코로나 사태 이후 등장한 동학 개미는 우리 증시 곳곳의 풍경을 크게 바꿔놓고 있는 중입니다. 특히 올해 정기 주주총회는 개인 투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주주 가치 제고’가 가장 큰 화두로 떠올랐을 정도인데요. 그런 가운데 지난달 31일 열린 한 기업의 주총에서는 그야말로 한국판 주주 중심주의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코스닥 상장 후 20여 년이 넘도록 배당조차 하지 않았던 회사, SM엔터테인먼트(이하 에스엠(041510))가 소액 주주들이 제안한 감사를 선임하는 동시에 창사 이래 첫 배당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죠. 소액주주들은 아무리 많아도 단결되기가 어려워 주총 표 대결로 갈 경우 결국 경영진(최대주주)에는 질 수밖에 없다는 세간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은 사건이었습니다. 에스엠뿐 아니라 이번 주총에서는 ‘소액 주주들의 승리’라고 불러도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요. 이번 주 ‘선데이 머니카페’에서는 개미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상장사들과 이런 변화가 가져올 우리 증시의 미래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성난 주주들에… 주주 측 감사 선임한 에스엠·최저임금 받기로 한 셀트리온(068270)
지난달 31일 열린 에스엠의 주총에는 수많은 소액 주주들의 시선이 쏠렸습니다. 에스엠 경영진과 감사 선임을 두고 맞선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가 과연 표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 것이죠. 앞서 얼라인 측은 에스엠이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개인 회사로 빠져나가는 수백 억 원대의 부적절한 비용 문제를 해결하려면 투명한 이사회 구성이 필요하다며 독립된 감사인 선임을 요구한 바 있습니다. 에스엠이 이수만 총괄의 개인 회사와 20년 넘게 용역 계약을 맺어 최대주주에 과도한 일감 몰아주기를 하면서 에스엠의 기업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엠 경영진도 의결권을 경영진에 위임할 경우 걸그룹 에스파의 멤버 카리나의 친필 사인을 주겠다며 표 대결을 준비하는 등 양측의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죠.
하지만 이날의 승부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습니다. 감사 선임에 대한 표 대결을 앞두고 에스엠 측이 제안했던 감사 후보가 자진 사퇴했다고 알리며 주주 제안을 사실상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죠. 주주 측이 제안한 곽준호 KCF테크놀로지 전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에스엠의 감사로 선임했고 경영진 측이 제안했던 사내·사외이사도 “주주 의견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사퇴하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창사 이후 첫 배당을 실시하기로도 했죠. 이처럼 주주 제안이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이 들리자 시장은 환호했고 에스엠은 장중 한때 7% 가량 오르며 사상 최고가(8만 5600원)를 경신하기도 했습니다.
주주들의 거센 목소리가 그대로 받아들여진 사례는 지난달 25일 셀트리온의 주총장에서도 발견됐습니다. 기우성 셀트리온 대표이사는 최근 주가 하락을 겪고 있는 주주들의 고통 분담을 위해 주가가 35만 원에 도달할 때까지 최저임금만 받겠다고 결정한 것이죠. 심지어 이 주주 제안은 주총 현장에서 즉석에서 나온 제안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현장에 참석한 주주들이 카카오와 카카오페이 사례를 언급하며 “기우성 대표가 책임 경영의 자세로 최저임금만 받겠다고 발표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하자 “동의하겠다”며 받아들였던 것이죠. 소액 주주들의 한층 높아진 위상이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승리는 아니라도 큰 변화 이끌어…'주주 행동주의' 원년될까
올해 주총에서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움직임도 거셌습니다. 에스엠처럼 주주 제안이 온전히 받아들여진 경우는 드물었지만 대부분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점에서 뜻 깊었다는 평가입니다. 일례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의 경우 토비스(051360)와 상상인(038540) 등에서 배당 확대와 자사주 소각,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했는데, 주총 표 대결에서는 모두 부결됐지만 토비스가 주총에 앞서 30만 주 자사주 소각을 결정했고 상상인도 첫 분기 배당을 실시하기로 하는 등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차파트너스는 사조오양(006090) 주주총회에서도 감사 후보를 추천하고 집중투표제 도입, 자사주 매입 등의 주주 제안을 했는데 추천 감사가 선임되며 일부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또 안다자산운용이 배당 확대와 집중 투표제 도입 등을 요구한 SK케미칼(285130) 역시 주주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주총 전이었던 지난달 22일 500억 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하는 등 주주들을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VIP자산운용으로부터 주주 서한을 받은 아세아와 아세아시멘트도 주총 소집 결의에 앞서 주주 친화정책을 공시했었죠.
업계는 2018년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가 마침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아니냐고 기대하는 모습입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업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를 소통·감시하는 기관 투자자의 수탁자 책임 원칙을 뜻하는 말입니다. 당시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며 여러 행동주의 펀드들이 기업에 주주 가치 제고를 요구하는 주주 서한을 발송하며 변화를 이끌어내려 했지만 당시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던 탓인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사실 에스엠의 사례만 보더라도 비슷한 주주 행동이 2019년에도 있었습니다. KB자산운용이 이수만 총괄 개인회사로 나가는 비용을 문제 삼으며, 에스엠과 합병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경영진의 단호한 거절과 미진한 기관 투자자의 움직임에 결실을 맺지 못했죠.
하지만 이제는 분위기가 정말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소액 주주인 동학 개미가 부쩍 늘어난 것이 힘이 됐죠. 실제 한국예탁결제원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주식을 소유한 개인은 1374만 명으로 2020년보다도 51%나 증가했습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즉 ‘올바른 일을 하는 기업’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증시도 변화시키는 힘으로 꼽힙니다. 예전처럼 지배주주에만 유리한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어진 셈이죠. 실제 에스엠과 얼라인의 대결에서 판세를 얼라인 측으로 기울게 했던 ‘한 방’으로는 주요 의결권자문기구들이 줄줄이 얼라인 측의 손을 들어줬던 것이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이밖에도 소액주주들이 결집하기 쉬워진 기술적 환경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입니다. 전자투표, 전자서명을 통한 위임 등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지며 뜻을 모으기가 한결 쉬워진 겁니다.
전문가들은 올해 나타났던 일련의 사건들이 향후 주주 중심주의, 주주 중심의 자본주의로 향하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 자산운용 대표 역시 “앞으로는 회사가 정상적으로 경영되지 않는다면 주주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주주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고도 말했습니다. 내년 주총에서는 소액 주주들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