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치러지는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가 확실시되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재선가도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10일 1차 투표를 앞두고 극우 성향인 마린 르펜 국민연합 후보의 지지율이 급등하면서 두 후보 간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 가격 등이 치솟으면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는 데다 또 다른 극우 후보인 재정복당의 에리크 제무르 덕에 르펜의 극우 이미지가 다소 누그러진 것도 마크롱을 위협하는 요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5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해리스인터랙티브가 발표한 프랑스 대선 여론조사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결선투표에서 득표율 51.5%로 르펜 후보(48.5%)를 불과 3%포인트 차로 앞설 것으로 예상됐다. 여론조사의 오차 범위가 ±3.1%인 점을 고려하면 르펜 후보의 당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프랑스는 10일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차지하는 후보가 없을 경우 2주 뒤인 24일 상위 1~2위 후보끼리 결선투표를 진행한다. 마크롱 대통령은 1차 투표에서 26.5%, 르펜 후보는 23%를 득표할 것으로 전망돼 결선투표행이 확정적이다.
불과 3주 전까지도 마크롱 대통령의 재선이 확실시됐다는 점에서 이 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지난달 16일 발표된 조사에서 마크롱은 득표율 58%로 르펜을 16%포인트 차로 압도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이후 발표된 세 차례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꾸준히 떨어져 어느덧 르펜과 오차 범위 이내의 접전이 전망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2017년 대선 결선투표에서는 마크롱 대통령이 르펜을 상대로 66%의 지지를 얻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르펜이 급격히 부상한 배경에는 인플레이션이 있다. 프랑스의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기 대비 5.1% 올라 1997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독일 CPI가 7.3% 상승한 점 등을 고려하면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대선을 앞두고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로이터통신은 "휘발유와 전기료 상한선 덕분에 프랑스는 다른 유로존 국가보다 낮은 인플레이션 수준을 유지했지만 마크롱의 경쟁자들은 구매력 감소라는 유권자들의 좌절감을 이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2월까지 '이민'에 초점을 맞췄던 르펜은 3월 들어 물가와 구매력을 자주 언급하며 인플레이션을 선거 이슈로 내세우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연료와 여타 상품 가격이 급상승하자 르펜이 생활비에 중점을 두며 선거 캠페인을 잘 이끌고 있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인시아드(INSEAD)의 다비드 뒤부아 디지털마케팅 교수도 "르펜은 이민에서 물가 상승으로 담화를 옮겨가며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일 반이슬람을 외치는 제무르 후보도 르펜의 지지율 상승을 돕고 있다. FT는 "극우 경쟁자인 제무르가 이슬람에 대한 공포 등에 집중하면서 르펜을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만들었다"며 "(극우 이미지) 디톡스라는 르펜의 오랜 과제를 의도치 않게 도와준 셈"이라고 설명했다. 보다 강경한 극우 후보가 그간 르펜의 발목을 잡아온 이미지를 희석시켰다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이슈에 집중하느라 국내 선거운동을 다소 등한시한 점도 지지율 하락의 원인으로 꼽힌다. CNN은 "마크롱은 상대 후보자들과의 토론을 거부하고 선거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마크롱 대통령의 패배를 전망하기는 이르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낙승을 예상해 기권하려던 마크롱 지지자들이 투표장으로 발길을 돌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데다 마크롱 대통령 자신도 패배 가능성을 의식해 지지층 결집을 이끌고 있어서다. 최근 마크롱 대통령은 "브렉시트와 다른 많은 선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며 지지를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