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분식집을 20년째 운영하고 있는 박선호씨(56)는 필요한 식자재를 지인을 통해 전화로 주문한다. 키오스크, 애플리케이션 등 디지털 플랫폼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지만 식자재 유통 구조는 20년 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는 “전화로 구두 주문을 하다 보면 가끔 엉뚱한 물건이 오거나 아예 물건이 안 와 곤란한 적이 꽤 있다”며 “장사는 해야 하니 급할 때는 근처 마트에서 비싼 값 주고 사오는 경우도 있다”며 허탈해 했다.
55조원에 달하는 국내 식자재 유통업계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 중심으로 운영되자 시장 발전을 위해 디지털 전환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식자재 유통 대기업을 중심으로 거래 플랫폼을 업그레이드하고 온라인 전담 인력을 늘리는 디지털 바람이 확산되고 있다.
27일 업계에 다르면 CJ프레시웨이는 식자재를 거래·주문할 수 있는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 개발에 한창이다. 이미 온라인 식자재 B2B(기업간 거래) 전용몰인 ‘온리원푸드넷’을 운영 중인데 이 곳은 CJ프레시웨이 영업사원과 계약을 맺은 고객만 접속할 수 있다. 새로운 플랫폼은 접속자와 취급 상품을 더 늘릴 것으로 보인다. CJ프레시웨이는 또 디지털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지난해 말 삼성SDS에서 디지털마케팅팀 수석을 지낸 인사를 디지털혁신담당 경영리더로 영입했다. 정보통신(IT)인재 채용도 늘려 디지털혁신담당 조직 규모를 올해 전년보다 50%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SPC삼립의 자회사 SPC GFS는 올 초 식자재 온라인 유통 플랫폼 ‘온일장’을 오픈했다. 앱을 설치하면 천안, 구미, 인천 등 식자재 마트에서 판매하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배송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재깍 배송 서비스’와 온라인에서 대량 구매만 가능했던 야채, 육류 등도 소량 주문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대상도 식자재 전문 온라인몰 ‘베스트온’을 최근 리뉴얼 했다. 자영업자 고객 데이터를 분석해 알아서 식자재를 원하는 날짜에 배달해주는 정비 배송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업들이 디지털 전환에 사활을 거는 것은 여전히 식자재 유통 시장이 아날로그 중심이기 때문이다. 국내 식자재 유통 시장은 2020년 55조에서 2025년 64조까지 커질 것으로 보이지만 시장의 80% 이상이 영세업체가 차지하고 있다. 오토바이나 트럭 한 대로 영업을 하는 개인 사업자까지 포함하면 그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이 같은 특징 때문에 산업 발전 속도가 더디다. 전통적인 영세업체들은 자체적인 자동화 시스템 구축이 어려워 직원이 아직도 직접 전화나 문자로 주문을 받고 수기로 장부를 기록한다.
업계 관계자는 “식자재 유통시장은 가정간편식 시장의 10배에 달하는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부분들이 선진화 되지 않았다”며 “디지털 혁신으로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고 고객 편의를 제공하는 기업이 앞으로 식자재 유통업계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대기업은 식자재 유통 구매 플랫폼을 갖추고 있는 스타트업을 인수해 시장 점유율을 더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스타트업들의 디지털 강화도 눈여겨 볼 만하다. 스타트업 스포카는 식자재 비용관리 앱 ‘도도 카트’를 선보였다. 자영업자들이 식자재 구입 명세서 사진을 앱에 등록하면 지출 비용을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리포트를 제공한다. 출시 1년여만에 누적 이용자 수 10만명을 돌파했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