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충돌의 뉴노멀' 열렸다…亞도 유럽도 앞다퉈 국방예산 늘려

[국제질서 룰이 바뀌었다] <중> 다시 달아오른 군비 경쟁

獨 "우크라 전쟁 이전과 같은 수 없다" 133조 들여 軍 강화

英日 국방예산 2배 확대 추진, 미러 사이서 군사질서 재편

나토·쿼드 군사동맹 중요성 커져…"韓 안보전략 다시 짜야"


2015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합동 군사 훈련 당시 독일군의 손에는 총 대신 검은색 페인트로 칠한 빗자루가 쥐어졌다. 총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독일은 평화의 시대를 만끽하며 군비 예산을 줄이고 또 줄였다. 보유 잠수함 6대가 모두 가동 불가 상태에 이르고 독일군 규모가 우크라이나 군대보다도 쪼그라들자 내부 비판이 나왔지만 독일 정부는 군비 감축 기조를 고수했다.

그러던 독일의 군비 정책이 올해 대전환을 맞았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3일 만인 2월 27일(이하 현지 시간) 군 전력 증강에 향후 2년간 1000억 유로(약 133조 원)를 쓰겠다고 밝혔다. 나토 회원국 중 최저 수준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군비 예산(1.3%)도 나토의 권고 수준인 2%로 끌어올리겠다고 천명했다. 숄츠 총리는 “우리는 전환점의 한가운데 있다”며 “앞으로 세계는 더 이상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 안보 질서가 급류에 휘말렸다. 냉전 이후 전 세계가 잊고 지냈던 ‘전쟁의 귀환’으로 세계 각국의 군비 증강 경쟁에 불이 붙었고 경제 논리가 우선시된 냉전 후 국제 질서에서 뒤로 밀려 있던 각 지역의 군사 동맹 기구는 어느 때보다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군사 동맹 확보가 시급한 대다수 국가들은 경제와 군사 안보,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중국·러시아라는 양대 세력 사이에서 치열한 눈치 싸움에 들어갔다. 이는 우리나라 역시 국방·외교 전략을 다시 써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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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독일뿐 아니라 유럽 각국이 코앞으로 닥친 러시아의 위협에 앞다퉈 군비를 확충하고 나섰다. 제러미 헌트 전 영국 외무장관은 최근 영국의 GDP 대비 군사 예산을 현 2.2%에서 4%까지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냉전 시대 수준의 군비 지출이다.

러시아의 군사 행동으로 중국발(發) 안보 위협을 의식하게 된 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다. 당장 일본에서는 글로벌 안보 리스크를 명분 삼아 국방 예산을 대폭 확충하고 평화 헌법을 개헌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하고 있다. 4일 열리는 미일 국방장관 회담에서는 일본의 군사 전략 체계를 방위력 한도를 규정한 기존의 ‘방위대강’ 대신 미국과 같은 형태의 방위 전략으로 바꾸는 방안도 추진된다. 전 도쿄 주재 미국 외교관인 미에텍 보두신스키는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의 동맹이라는 자리에 서려는 행보”라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중국 침공을 현실 문제로 인식하게 된 대만 역시 미국과의 무기 거래를 확충하고 있다.

싱가포르 연구기관 ISEAS-유솝 이샥 연구소의 윌리엄 충 선임연구원은 “인도태평양 지역에는 미국을 비롯해 중국·인도·일본·러시아·남북한 등 전세계 군사 대국 가운데 7개 나라가 모여 있고 남중국해·대만·한반도·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분쟁 지역도 있다”며 “나토와 같은 평화 안보 기구조차 없어 훨씬 더 위험해질 수 있는” 아시아 지역에서 각국의 군비 증강 움직임이 더욱 속도를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각국이 군사 논리로 움직이면서 군사 동맹의 중요성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나토는 스웨덴과 핀란드·코소보·보스니아에서 가입을 추진하며 세 확장에 나섰다. 아시아태평양에서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영국·호주의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가 기존 호주의 핵잠수함 부문을 넘어 극초음속 미사일 분야까지 협력 범위를 확대하는가 하면 회원국 범위를 더욱 늘릴 수 있다는 관측이 끊임없이 나온다. 아시아판 나토로 불리는 쿼드(Quad) 역시 기존 미국·일본·인도·호주 외에 한국과 뉴질랜드·베트남 등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이 최근 솔로몬 제도와 안보 협정을 체결하며 남태평양에서의 세력 불리기에 나선 가운데 미국과 중국을 각각 중심 축으로 삼는 안보 갈등은 앞으로 더욱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안보 질서의 변화는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구상으로 모호함을 추구했던 우리나라의 외교 전략이 더 이상 세계 무대에서 먹혀들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보와 진영 논리가 강화된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군사적 기여가 없는 동맹에 대한 배려는 점점 더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나토는 6월 회의에 아시아태평양 국가인 한국과 일본을 초청하며 우리나라를 새로운 안보 동맹의 시험대에 올리고 있다.

한편 군사 질서 재편의 과정에서 전 세계 경제 타격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국제 신용 평가사인 무디스는 이탈리아·스페인·벨기에·포르투갈이 국방비를 GDP의 2%까지 올릴 경우 재정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케네스 로고프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군비 확충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흥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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