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학생 시절이던 1980년 중반, 플라자 합의 전만 해도 전 세계 반도체의 50% 이상을 일본이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30년 남짓 지나 점유율이 0%로 수렴하는 현실을 보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우리 정부가 지금 현금 살포 같은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
최근 기자와 대화를 나눈 한 노(老)교수가 토로한 말이다. 교수의 지적은 정확하다. 1980년대 미일 반도체 경쟁 국면에서 미국에 완패한 일본은 이후에도 정부의 방관 속에 경영 혁신에 번번히 실패했다. ‘첨단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과 중국·대만 등 후발 주자가 치고 올라오는 사이 기술 우위를 고스란히 내줬다. 이제 세계 10위 반도체 업체 가운데 일본 기업의 이름은 없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영광과 몰락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나라를 먹여 살린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실은 어떤가. 많은 전문가들은 백척간두에 선 상태로 자칫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신(新)냉전 구도 속에서 전체주의 국가들은 원자재·물류를 무기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중국 시장에서 지난 3년간 한국의 점유율은 5.5%포인트나 떨어졌다.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한국의 입지는 위태롭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꾀하면서 우리 기업의 현지 투자만 강요하고 있다. TSMC 등 대만 기업들은 비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앞세워 한국 기업들과의 격차를 점점 벌리고 있다. 삼성전자가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분야에는 인텔까지 재참전을 선언했다.
결국 믿을 것은 기업가 정신과 기술력 확보다. 정부는 규제 완화, 세제 혜택, 관치 자제 등 기업인들이 마음껏 뛸 수 있는 기반만 마련해주면 된다. 각국이 핵심 기업들에 전폭적 지원을 앞다퉈 내놓는 상황에서 우리만 손을 놓을 수는 없다.
글로벌 불확실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시점에서 국정의 초점은 첫째도, 둘째도 경제와 기업이 돼야 한다. 정치가 선거 승리나 지지율 관리에만 몰두하면 첨단 기술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K반도체’와 같은 참담한 이름으로 숟가락을 얹을 생각도 말아야 한다. 기업을 정권의 입맛에 길들이는 개입 행위도 이제는 버려야 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반도체 육성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다만 대통령 집무실 이전, 자영업자 손실보상, 사병 월급 인상 등 국가적 우선 과제가 아닌 분야에도 쓸데없는 에너지를 쏟는 모습은 여전히 볼썽사납다.
새 정부는 출범 초부터 반도체를 비롯한 미래 먹거리 준비에만 온 힘을 쏟기를 바란다. 이미 지금도 늦었다. 경쟁 상대는 아직도 ‘검수완박’ 따위가 중요한 더불어민주당이 아니라 ‘전 세계’다. 일본의 현재는 우리에게 닥쳐올 미래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