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여명] 과학기술 강국의 꿈

■고광본 선임기자

美·中 등 과학기술 중시 국정 펴는데

첫발뗀 尹 정부에선 외려 '과기 홀대론'

박정희·김대중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컨트롤타워·생태계 구축 의지 보여야





“(이것은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역(逆)두뇌 유출입니다.” 196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방문한 휴버트 험프리 미국 부통령이 초대 KIST 사령탑인 고(故) 송곡 최형섭에게 한 말이다. 미국의 한국계 과학자를 중심으로 KIST에 인재가 몰린 것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96년 KIST 설립 후 3년간 적어도 매월 한두 번씩 그곳을 방문했다. 경제기획원 장관의 KIST 예산 삭감 등 일이 있을 때마다 방패막이도 됐다. 송곡은 생전에 “국가원수가 자주 연구소에 들르는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며 “연구원의 사기가 극도로 올라갔고 정부 관리의 사고나 행동도 완전히 달라졌다”고 술회했다.

이런 지도자의 과학기술 입국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전쟁의 폐허에서 주력 산업인 자동차·조선·철강·석유화학 등의 중화학공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의 정적으로 군사독재 시절 네 차례나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 역시 과학기술을 중시한 지도자로 꼽힌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대위기 사태의 와중에도 대학, 정부 출연 연구기관, 기업 등에 지원하는 정부의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을 3.6%에서 임기 마지막 해(2002년) 4.7%까지 끌어올렸다. 윤석열 정부가 최근 “R&D 예산을 정부 총지출의 5% 수준(올해 4.9%)에서 유지하겠다”는 국정 과제를 제시한 것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당시 (DJ가) 초고속 인터넷 망을 깔고 벤처 붐을 일으켜 우리가 20년간 먹고살았다”(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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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과 기술 패권 시대를 맞아 해외 주요 지도자들의 과학기술 중시 국정 운영도 가속도를 내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의 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한 데 이어 국가 전략기술 등 과학기술 투자를 크게 확대하고 나섰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2013년 이후 3연임 성공(11월)을 예고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반도체·인공지능(AI)·바이오·우주 등 ‘과학기술 굴기’를 통해 미국을 뛰어넘는 패권국으로 부상하겠다고 구상하고 있다. 지난해 기초연구 투자(1696억 위안)가 올해 우리 정부의 R&D 예산(29조 8000억 원)을 능가했을 정도다.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도 반도체 등 과학기술 투자 확대를 통해 올해 1인당 국민소득 측면에서 19년 만에 한국을 추월한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이처럼 국내외를 막론하고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지도자는 긴 호흡으로 국가 경쟁력과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우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과학기술 강국의 꿈은 효율적인 컨트롤타워와 시스템을 구축하고 과학기술인의 사기와 기업가 정신을 어떻게 고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과감히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생태계를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서울경제가 그동안 기초과학, 초격차, 기업가 정신 등 과학기술을 주제로 10차례 이상 대형 국제 포럼(서울포럼)을 매년 개최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서울대·KAIST 등 전국 대학 10곳에 이어 올해 KIST·ETRI 등 출연연까지 R&D 현장을 돌며 ‘기업가 정신 토크 콘서트’를 열고 연쇄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언론사에서 유일하게 국제 우주포럼을 4년째 개최하며 우주 컨트롤타워와 뉴스페이스(민간 주도 우주 개발)를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정부가 경제 위기와 외교·안보 리스크라는 복합 위기 속에 10일 출범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과학기술계에서는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뀐 분위기다. 심지어 이명박(MB) 정부에 이어 ‘과학기술 홀대론’까지 퍼지는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 정부가 ‘경제·안보의 핵’인 과학기술을 키워 주요 5개국(G5)의 토대를 닦으려면 과학기술부총리의 창조적 부활, 산학연의 파괴적 R&D 대혁신, 국가 지도자의 연구 현장 수시 격려 방문 등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열쇠는 최고 지도자의 의지다.

고광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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