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물가 전망이 심상치 않습니다. 한은 조사국은 26일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4.5%로 발표했습니다. 이전 전망치 3.1%보다 1.4%포인트나 한 번에 올려잡은 것입니다. 한은의 물가안정목표가 연간 2%인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상향 조정입니다. 2008년 7월에 물가가 당해연도 4.8%가 되리라고 본 지 13년 10개월 만에 가장 높은 전망입니다. 물가를 보수적으로 전망하는 한은이 한국개발연구원(KDI, 4.2%)이나 국제통화기금(IMF, 4.0%)보다 높은 수치를 내놓으면서 시장은 깜짝 놀랐다는 반응입니다. 한은이 크게 올려도 4%대 초반 정도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첫 금융통화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물가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신호를 계속 줬습니다. 이 총재는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을 우려하기보다 물가 상방 위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성장보다 물가의 부정적 파급 효과가 더 크게 예상돼 선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인플레이션이 높아지면 취약계층이 더 큰 피해를 중장기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 등 물가 걱정을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금통위 역시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 향후 금리 인상 시기에 대해 “당분간 물가에 보다 중점을 두고 통화정책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라고 표현을 바꿨습니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은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겠다는 의미로 매파적(통화 긴축 선호) 입장을 드러낸 제시한 것입니다. 그동안 금리 인상에 회의적이었던 대표적 비둘기파(통화 완화 선호) 주상영 금통위원조차 금리 인상에 손을 들 정도입니다. 4월과 5월 금통위의 금리 인상은 모두 만장일치였습니다.
도대체 물가가 어떤 상황이길래 한은이 이렇게까지 걱정하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26일 경제전망 간담회에서 김웅 한은 조사국장이 설명한 4가지 이유를 토대로 물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을 살펴봤습니다.
① 원유 의존도 높은데 국제유가 급등
먼저 국내 물가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단연 에너지 가격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로 러시아산 원유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면서 국제유가는 올해 들어 높은 오름세를 기록 중입니다. 한은이 2월 물가 전망을 할 때까지만 해도 원유 도입 단가(기간 평균)를 85달러로 봤는데 이번엔 102달러로 20% 높였습니다. 한은이 2월 물가 전망치를 발표하는 날(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유가가 이 정도로 급등할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에너지 가격이 오른 만큼 물가 전망치를 상향 조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 국장의 설명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원유 의존도가 높은 경제·산업 구조를 지녔기 때문에 국제유가 상승에 취약합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37개국 중 원유 의존도가 가장 높습니다. GDP 대비 원유소비량이 가장 많고, 1인당 원유소비량은 4위를 기록할 정도입니다. 경제 규모(10위) 대비 원유소비량(7위)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비용 상승 압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도 국제유가 등 각종 원자재 가격이 수입물가를 밀어 올리면서 생산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다시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가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② 한 해 농사 망쳐…애그플레이션 길어진다
두 번째는 애그플레이션(곡물 가격 상승으로 인한 물가 상승)입니다. 기상이변으로 주요국 곡물 생산국의 생산량이 영향을 받은 데다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공급망 붕괴로 곡물 가격 불안은 지난해부터 감지됐습니다. 그러던 것이 유럽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영향이 커졌습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OA)가 매달 발표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올해 3월 159.3포인트로 전월 대비 12.6% 상승해 집계를 시작한 1990년 1월 이후 가장 높습니다. 한은은 전체 곡물 가격이 코로나19 이전 대비 60% 정도 오른 것으로 파악했는데 밀이나 옥수수 등 일부 품목 상승률은 더욱 높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곡물 가격 상승은 국내 물가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곡물 가격이 가공식품 가격에 영향을 주고 다시 외식 가격을 통해 개인 서비스 물가를 끌어올리는 등 연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국제유가가 떨어지더라도 곡물 가격이 안정되지 않아 물가에 영향을 계속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파종도 못 하고 수확기도 놓쳤기 때문에 한 해 농사를 망쳐서 1년 이상 넘어가는 문제로 봐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총재도 “곡물 가격이라는 것이 경작하고 공급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한 번 올라가면 상당한 정도로 오래 지속한다”며 “곡물 가격이 높은 수준이 지속하면 식료품과 관련된 여러 물가가 영향을 받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③ 들불처럼 번지는 인플레에 5월 물가 5% 넘어
세 번째로는 물가 상승세가 여러 품목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 품목만 가격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확대되는 추세입니다. 앞서 한은이 1월 조사한 결과 근원물가 전체 품목 309개 가운데 2% 이상 상승한 품목 개수는 150개로 집계됐습니다. 4개월이 지난 만큼 물가 확산은 확산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 국장은 “물가가 천천히 오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광범위한 품목에서 오르고 있다”고 했다. 결국 한은과 정부 모두 다음 달 발표될 5월 소비자물가가 5%를 넘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기대인플레이션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관찰됩니다. 5월 기대인플레이션은 3.3%로 전월 대비 0.2%포인트 오르면서 9년 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어떤 품목 가격이 오를 것으로 보냐는 질문에 다양한 품목이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물가 상승 주요 원인으로 꼽혔던 석유류 제품이 4.4%포인트 감소한 반면 공업제품과 농축수산물이 각각 1.7%포인트, 1.6%포인트 상승한 것입니다. 소비자들은 기름값뿐 아니라 공공요금부터 식자재까지 전반적인 물가가 오르고 있다고 체감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기대인플레이션이 제품 가격 상승과 임금 인상 등으로 이어지는 2차 파급효과가 눈앞에 다가온 상황입니다.
④ 거리두기 풀리자 대면 소비 폭발
마지막은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로 인한 수요 회복입니다. 물가 상승 원인은 크게 수요 측 요인과 공급 측 요인으로 분류됩니다. 그동안 물가 상승은 유가 등 원자재 가격 상승이나 공급망 병목 등에 기인한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랬던 것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수요 견인 인플레이션’도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시중 유동성이 크게 늘어났는데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리면서 억눌려 있던 대면 소비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최근 물가 상승에 수요와 공급 요인이 각각 어느 정도씩 반영됐는지 정확히 구분하긴 어렵지만 수요측 물가압력이 크게 반영되는 근원물가(식료품·에너지 제외)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원물가 상승률은 올해 1월 2.6%에서 4월 3.1%로 0.5%포인트 올랐습니다. 한은은 올해 근원물가를 올해 연간 3.2%로 전망했습니다. 정부가 추진 중인 2차 추가경정예산안도 물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은은 2차 추경이 경제성장률을 0.2~0.3%포인트 높이는 동시에 물가도 0.1%포인트 높일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반면 물가를 낮출 수 있는 하방 요인은 뚜렷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경기 회복세가 지금보다 더 꺾여서 수요가 줄어드는 정도입니다. 물가 상방 요인으로 거론됐던 국제유가나 곡물 가격이 예상보다 빠르게 안정된다면 물가도 진정되겠지만 불확실성이 큽니다. 결국 정부가 공공요금을 낮추거나 유류세를 감면하는 등 정책적인 조치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모든 전망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올해 연말 이후 점차 완화되고 중국이 하반기까지 간헐적으로 코로나 봉쇄조치를 시행한다는 전제로 이뤄진 것입니다. 만약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하고 중국 봉쇄조치도 장기화한다면 물가는 더 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은은 물가 하방 요인보다 상방 요인이 더 크다고 보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