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최고경영자(CEO)들이 총출동해 2기 준법감시위원회와 처음으로 마주했다. ‘반도체 위기론’을 타개하기 위해 새 정부 들어 급박한 경영 움직임을 보이는 삼성전자(005930)가 이번에는 내부 개혁에 팔을 걷어붙이는 모양새다. 이찬희(사진) 준법감시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을 공개 요구했다.
한종희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부문장(부회장) 등 삼성그룹 7개 계열사 CEO들은 3일 오후 3시 삼성전자 서울 서초사옥 6층 대회의실에서 이 위원장을 비롯한 준법감시위원 전원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삼성 CEO들이 준법감시위원들과 간담회를 연 것은 2월의 2기 위원회 출범 이후 처음이다.
1기 위원들과는 지난해 1월 자리를 함께한 바 있다. 이날 참석한 기업은 삼성전자와 삼성SDI·삼성전기·삼성SDS·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화재 등이다.
이 위원장은 간담회 참석에 앞서 취재진과 만나 “글로벌 기업인 삼성의 최고경영진이 재판 때문에 제대로 경영을 할 수 없다면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보는 것”이라며 “국민의 뜻에 따라 사면 결단을 내려주셨으면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정치든 경제든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국민들은 코로나19 이후 정말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국가 경제가 발전하고 본인들의 생활이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강조했다.
준법감시위는 간담회에서 노사 관계와 지배구조 개선을 포함한 준법경영 전반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간담회 의제에는 그동안 논의됐던 인권이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정 경영 등도 포함됐다. 특히 지배구조 개편 문제와 관련해 현재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보고서나 삼성 내부에서 관련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에 대해 의견이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CEO들과 위기의식 공유…지배구조 개편·ESG경영 가속
3일 삼성 7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과 준법감시위원들 간 전격 회동은 최근 삼성그룹이 떠안은 위기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3년 전 공언한 ‘2030년 시스템 반도체 세계 1위’ 목표 달성이 기술적 문제 등으로 불투명한 상태다. 그룹 전체적으로도 바이오 이후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이 부회장 발목에 사법 족쇄까지 남아 있어 대외 이미지 개선과 조직 내부 쇄신도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날 간담회에는 전직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출신인 이찬희 준법감시위원장 등 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사뭇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삼성 측에서는 한종희 삼성전자 DX부문장(부회장)을 비롯해 최윤호 삼성SDI 사장, 고정석 삼성물산 사장, 전영묵 삼성생명 사장, 황성우 삼성SDS 사장, 홍원학 삼성화재 사장,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 등 7개 계열사 CEO가 참여했다.
CEO들은 이날 간담회에서 각종 안건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각 계열사 준법 경영 현황과 향후 강화 방안은 물론 개혁 과제, 임금 협상 실태, 임금피크제(기업이 근로자들의 정년을 연장해주는 대신 임금을 단계별로 하향 조정하는 제도) 대법원 무효 판결에 따른 입장 등을 두고 각자의 생각을 공유했다.
특히 2기 준법감시위원회의 핵심 과제인 지배구조 개선 계획도 심도 있게 논의했다. 이 위원장은 간담회에 앞서 현장에서 취재진과 만나 “1기 준법감시위 성과 위에서 2기 위원회가 나아갈 방향, 건전한 긴장 관계 속에 삼성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방법,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더 성장하기 위해 가져야 할 준법 경영 의지를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노동조합 안건도 다루느냐’는 질문에도 “전반적으로 다 얘기할 것”이라고 수긍했다.
이 위원장이 ‘이재용 사면론’을 부각한 발언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위원장은 “국민들은 코로나19 이후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가 경제가 발전하고 본인들의 생활이 나아지기를 바란다”며 “국내 최고이자 글로벌 기업인 삼성의 최고경영진이 재판 때문에 제대로 경영을 할 수 없다면 결국 피해는 국민이 볼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준법감시위원회의 공식 입장이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그 부분(이 부회장 사면)을 계속 얘기했기 때문에 위원들도 나와 같은 의견을 가졌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 부회장과 위원들 간 만남 시기에 대한 질문에는 “이 부회장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 데다가 코로나19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만큼 조금 더 정리되면 만날 계획”이라며 “서로 만날 준비는 다 돼 있다”고 소개했다. 이 부회장은 3월 14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 사옥 집무실에서 이 위원장만 독대한 바 있다. 이 위원장은 당시 △인권 우선 경영 △공정하고 투명한 경영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등 2기 준법감시위의 3대 중점 과제를 공유하고 독립적으로 소신껏 운영하겠다는 뜻을 이 부회장에게 밝혔다.
이 부회장은 이에 준법감시위 운영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위원들 전체와 간담회를 갖고 만남을 정례화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이 부회장과 위원회 위원들과의 만남 정례화는 위원회 1기 때 이미 검토했다가 이 부회장이 2021년 1월 재수감되면서 논의가 중단됐다. 이 위원장은 2월 취임 기자 간담회에서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외부 전문가의 조언과 내부 구성원의 의견을 다양하게 경청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삼성 CEO들이 단체로 준법 경영 의지를 다진 것은 최근 잇따르는 삼성의 조직 내·외부 격변의 또 다른 단면이라는 평가다. 이 부회장이 본격적으로 경영 보폭을 넓히기 전에 그의 활동에 비판적인 여론을 안심시키는 조치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현재 취업 제한으로 출국과 경영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이 부회장과 삼성은 실제로 윤석열 정부 출범을 기점으로 잇단 파격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평택 반도체 공장을 직접 안내한 데 이어 21일과 30일에는 미국의 퀄컴·인텔 CEO를 연달아 마주했다. 31일에는 6년 만에 삼성 호암상 시상식에도 참석했다.
나아가 이달 2일에는 정기 인사철이 아님에도 반도체 부문에서 부사장급 10여 명을 비롯한 임원 20여 명을 교체하는 결단을 내렸다. 또 7~18일에는 유럽 출장을 떠나 네덜란드를 포함한 3개국 이상을 둘러볼 예정이다. 이 부회장이 해외로 떠나는 것은 지난해 12월 중동 출장 이후 6개월 만이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미국 인텔과 손잡고 세계적인 반도체 설계 업체(팹리스) ARM을 공동 인수할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