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에 깊은 신뢰를 보냈던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 출신의 임원이 삼성증권(016360) IB 업무를 총괄하게 돼 눈길을 끈다. 이 부회장은 골드만삭스 회장을 만나 반도체, 스마트폰 등 삼성전자 주력 사업 투자 계획을 논의할 정도로 신뢰가 두텁다. 삼성증권 신임 IB1부문장은 삼성전자가 추진하는 인수합병(M&A)에서도 한 축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IB 업계에 따르면 삼성증권은 이재현 골드만삭스PIA 한국담당 대표를 IB1부문장 부사장으로 내정했다. 이 부사장은 골드만삭스PIA로 자리를 옮기기 전 BNP파리바에서 근무했고, 그보다 앞서 골드만삭스 홍콩 등에서 IB 자문 업무를 맡았다. 골드만삭스가 그의 친정인 셈이다.
이번 인사는 골드만삭스와 탄탄한 파트너십을 추구해온 이 부회장의 행보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 부회장은 2014년 12월 진 사익스(Gene Sykes) 골드만삭스 전 회장을 만나 삼성그룹의 미래 전략을 논의했다.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 사업 전략 및 고성능 부품, 디스플레이, 카메라 기술 등 하드웨어 차별화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뤘다. 소프트웨어 투자 확대 내용도 논의에 포함됐다.
이 부회장과 골드만삭스의 밀월은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물산(028260)-제일모직 부당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회계부정 혐의' 재판에서도 확인됐다. 진 사익스 전 회장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형진 골드만삭스 한국대표 등 3명에게 보낸 이메일이 공개되면서다.
사익스 회장은 “제이(이재용 부회장)가 오늘 저를 만나러 왔다”며 대화 내용을 전했다. 검찰 측이 이 부회장이 골드만삭스와 경영권 승계 방식을 논의했을 것으로 의심하자 이 부회장 측이 멘토링 차원의 만남이었다고 해명하기 위해 이메일을 공개한 것이다.
당시 이 부회장과 사익스 회장 사이에서 오간 대화는 시간이 지난 후 대부분 실천에 옮겨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부회장은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 선언을 통해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공언했다. 스마트폰 분야에선 폴더블폰을 선보이면서 하드웨어 차별화에 성공했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 소프트웨어 발전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까지 대화 내용과 판박이였다. 이 부회장이 골드만삭스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만간 부임할 이 부사장은 삼성증권에서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긴 임병일 부사장과 호흡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임 부사장은 리먼브라더스, 크레디트스위스(CS), UBS 서울 지점을 거친 인물로 이 부사장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IB 출신이다. 지난해 삼성증권 IB부문 총괄 본부장으로 부임했으나 대형 M&A를 준비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부름을 받고 6개월 만에 적을 옮겼다. 임 부사장이 M&A 실무를 담당하기 위해 삼성그룹에 합류한 것을 고려하면 후임자인 이 부사장의 역할도 당분간 삼성전자 M&A 지원에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이 부회장이 지난 7일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삼성전자의 대형 M&A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관측도 나온다. 영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ARM이 유력 인수 후보로 급부상했다. 앞서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ARM 인수를 추진했으나 반독점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무산된 바 있다. 삼성전자가 ARM을 인수하려면 다른 기업과 공동 인수를 추진해야 하는데 인수 구조를 짜는 과정에서 이 부사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활용될 수 있다.
한 IB 업계 관계자는 “삼성증권이 전통적으로 외국계 IB 출신을 선호하는 건 글로벌 역량을 중시하는 오너 일가의 의중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해외 대형 기업 M&A를 앞두고 있는 것도 이재현 부사장 영입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