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약사입니다. 화상투약기가 약사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국민 건강에 위해를 가하는 기술이라면 애당초 개발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박인술(60) 쓰리알코리아 대표는 17일 서울시 금천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정부의 희망 고문에 허송세월하면서도 이번에는 혹시 하는 기대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다 보니 10년이 흘렀다”고 토로했다.
쓰리알코리아의 화상투약기는 환자가 기계 앞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약사에게 화상으로 증상을 말하면 약사가 원격으로 증상에 맞는 약을 추천하는 비대면(언택트) 시스템이다. 2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에 실증 특례 안건으로 상정될 예정이다. 그는 “제발 시범 사업만이라도 가능해져 화상투약기가 현장에서 운영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서 애절한 눈빛으로 사무실 한편을 차지한 화상투약기를 바라봤다.
박 대표는 2012년 서울 동작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다 화상투약기를 개발했다. 가정상비약 일부에 한해 편의점 판매를 허용하는 안전상비의약품제도 도입을 앞두고 약사 사회가 한창 시끄럽던 시기였다. “늦은 밤 약국이 문을 닫아 편의점에서 약을 사야 할 상황이라면 원격으로라도 약사와 상담하고 약을 받아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는 게 첫 시작이었다.
2013년 인천 부평의 한 약국에 투약기를 설치했지만 두 달여 만에 철거됐다. 대한약사회의 반발이 워낙 컸다. 약사법 제50조인 ‘약국 개설자 및 의약품 판매업자는 그 약국 또는 점포 이외의 장소에서 의약품을 판매해서는 안 된다’에 위배된다는 주장이었다. 3년 뒤인 2016년 화상투약기를 합법화하는 약사법 개정이 시도돼 다시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결국 국회에서 자동 폐기됐다. 박 대표는 “그때는 정말 희망이 사라졌었다. 사업을 접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며 회고했다.
마지막 희망은 과기부의 규제 샌드박스 제도였다. 7억 원을 들여 온도 조절 시스템 등을 강화한 화상투약기의 세 번째 버전을 개발해 2019년 1월 과기부 ICT 규제 샌드박스 실증 규제 특례(시범 사업)로 신청했다. 하지만 3년 5개월 동안 심의위 상정이 수차례 불발되며 제자리를 맴돌았다. 업계에서는 “약사 출신 국회의원들을 필두로 약사 단체의 반대를 의식한 복지부가 심의위 상정을 막고 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박 대표는 “차라리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면 진작 접었을 텐데 규제 샌드박스 심의만 기다리다 여기까지 왔다”고 허탈해했다. 국내 화상투약기가 빛을 보지 못하는 동안 경쟁 국가들의 기술은 빠르게 발전했다. 중국에서는 인공지능(AI)을 탑재한 화상투약기가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20일 심의위 안건 상정을 앞두고 있지만 사정은 지난 10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한약사회는 19일 대통령실 인근 전쟁기념관 앞에서 대규모 약사궐기대회도 열 예정이다. 오작동 및 개인정보 유출·약화 사고 등으로 국민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논리다. 박 대표는 “화상투약기가 합법화되면 수많은 경쟁 업체가 뛰어들 것이기 때문에 큰돈을 버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며 “시범 사업만이라도 가능해져 제 인생의 모든 것이 담긴 화상투약기가 실제로 운영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