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글로벌 공급망 관리의 핵심 현안으로 떠올라 새 정부에서 우선 집중하는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반도체 외 다른 국가전략기술들의 육성에도 역점을 둬 과학기술 5대 강국 도약의 토대를 닦을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과학기술 사령탑이 된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24일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서울경제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국가전략기술이 반도체밖에 없느냐’고 지적한다”고 전하자 “맞는 얘기다. 반도체 외에도 여러 국가전략기술에 투자하고 산학연 간 실질적인 협력 생태계를 만들겠다”며 의지를 피력했다.
이 장관은 2002년 KAIST 연구팀과 함께 비메모리 업계의 표준 기술인 ‘3D 벌크 핀펫’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이후 삼성전자와의 관련 특허 소송에서 승소한 인물이다. 부처 장관으로서는 상당히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지난달 장관 취임 전까지 4년 여간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을 지냈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대선을 준비하면서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반도체 인력 양성을 강조하며 인연을 맺었다.
이 장관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미중 패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중국을 제외한 반도체 공급망 관리에 주력하고 있다”며 “기술 패권 시대에는 전략기술 확보가 국가의 명운을 가르는 만큼 기술주권 확립에 나설 것”이라고 역설했다.
대담=고광본 선임기자(부국장)
현재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5G·6G는 선도형 기술로 꼽히지만 인공지능(AI)·수소·첨단로봇·사이버보안은 경쟁형, 양자·첨단바이오·우주·항공·차세대원전은 추격형으로 분류된다. 이 중 우리가 중국보다 앞서는 것은 반도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등 일부에 불과하다. AI·바이오·빅데이터·모빌리티·양자·로봇·우주항공 분야 등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중국을 뒤좇아가는 형국이다.
그는 “선도형 기술은 경쟁국과 격차를 벌리는 초격차에 나서고, 경쟁형 기술은 새롭게 격차를 벌리는 신격차, 추격형은 기존의 격차를 줄이는 감격차에 나서야 한다”며 “반도체도 우리가 D램 등 메모리반도체에서 강세를 보이나 시장 규모가 훨씬 큰 비메모리 시장에서는 후발 주자”라고 진단했다. 실제 비메모리반도체인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세계 10대 팹리스(설계와 판매 전문)에서 미국은 퀄컴·브로드컴·엔비디아 등 6개나 되나 우리는 하나도 없다. 시스템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의 시장점유율도 대만의 3분의 1정도에 그친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쪽에서도 일본·유럽 기업에 비해 크게 밀리고 있다.
이 장관은 “우리가 반도체를 제외하고 국제 협상력을 가질 수 있는 지렛대 기술이 있느냐”고 지적하자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1등이라고 하나 양산 기술을 잘할 뿐"이라며 "진짜 초격차를 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탁월한 인재”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이어 “AI 등에서 초격차를 하자고 하는데 말이 안된다. 격차를 줄여야 한다”며 “지식 기반 산업을 열어 신격차, 감격차에도 나서야 할 전략기술이 많다”고 했다. 국가전략기술의 성격이 다 달라 일률적으로 대처하면 안되고 맞춤형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반도체처럼 잘나가는 기업도 있고 산학연 연구 협력도 하는 곳도 있지만 양자처럼 미국·중국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고 기업에서도 인력이 없는 분야도 있다”며 공통적으로 핵심인력 양성의 중요성을 거듭 피력했다. 이를 위해 대학이 고급인재 양성에 좀 더 에너지를 쏟고 국가적으로도 전략기술 관련 인재 관리와 글로벌 인재 유치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과학기술 학회장이나 기업 등 각 분야의 리더들이 인재양성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를 달라는 요청도 했다.
이 장관은 “중국은 5년 내 50만 명의 반도체 인력을 키우기로 했다.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의 K반도체 전략을 보면 10년간 3만 6000명을 키우기로 해 5년이면 1만 8000명인 셈인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도체는 속도 경쟁이 중요한데 교육 인프라를 잘 갖춰 질적으로 우수한 학생을 신속히 많이 키우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 장관은 “과기특성화대나 종합대학에서 반도체 계약학과를 하며 ‘교수나 기숙사 늘려 달라’고 하고, 언론은 ‘학부생 정원만 늘리면 뭐하나. 교수와 대학원생을 늘려야 한다’고 한다”며 “지금 대기업에서 대학으로 오려는 사람도 많고 출연연의 박사들을 겸임교수로 충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KAIST 학생이 국가연구소(정부 출연 연구기관)에서 공부하기 쉽지 않은데 어떻게 고리를 만들어줄지 고민하겠다고도 했다. 현재 출연연에서 많은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연구하고 있지만 좀 더 대학과 출연연 간 인력 양성에 힘을 모으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 장관은 산학연 간 신뢰를 통한 협력 생태계 구축이 절실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 산학연 협력을 형식적으로 하면 안 된다”며 “AI 회사들을 만나니 ‘몸값이 비싼 박사들을 모두 탐구 영역에 돌릴 수도 없고 비싼 장비 활용도 어려우니 대학이나 출연연에서 역할을 좀 더 해달라’고 한다. 산학연 협력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산학연 협력 과정에서 서로 보안을 내세우는 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믿음을 갖고 문화와 규제를 합리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했다.
특히 기초연구를 넘는 단계에서는 단편적 기술만으로는 경쟁력을 만들기 어려워 융합 연구가 절실하다고 피력했다. 그는 “TRL(기술 숙성도) 측면에서 기술 단계를 볼 때 중간에 공백이 있다”며 “기초로 끝나는 과학 연구도 많지만 실용성이 있는 것도 많아 출연연에서 이런 것을 잘 찾아서 연구하고 상업성이 좋으면 기업으로 넘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출연연이 국가전략기술의 저장고이자 산학연 협력의 매개체로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학연 간 유기적 R&D 협력 과정에서 고급 인력도 자연스레 길러질 수 있다고도 했다.
이 장관은 “출연연 원장들이 ‘공공기관을 관리하는 기획재정부가 예산을 통으로 주면 연구소에서 우선순위를 정해 추진하며 효과가 클 텐데 자율권이 없다’고 하소연한다”고 전하자 “그동안의 통제 원인이 관성이나 고정관념에 의해서 일 수도 있어 이 문제를 기회가 될 때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하고 소통하겠다”고 답했다.
아울러 출연연이 정부나 기업에서 연구 과제를 수주해 인건비를 충당하는 PBS(연구과제수주시스템) 비중이 절반가량인데 경쟁 취지는 좋지만 자칫 생계형 연구로 내모는 문제에 대해서는 “출연연 고유 임무를 달성하려고 해도 과제를 따는 게 우선이 될 수 있다”며 “해법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 부처 간 문턱을 낮추고 부처와 기관 내 칸막이를 낮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자 “풀어보려고 노력하겠다.인재양성 이슈도 좋은 아이디어는 교육부에 주겠다. 국회의원들에게도 ‘과기부가 중심이 돼달라’고 하면 안된다고 했다. 교육부가 중심이 돼야 한다. 그래야 도와준다”고 속내를 토로했다. 그는 “대학에서도 이공계와 의대가 융합연구를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자 “미국과 달리 우리는 교수 간에도 협력이 쉬지 않다. 이것은 신뢰의 문제이다.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담담히 말했다.
국가 R&D 대혁신 측면에서 쪼개기 식 정부 연구 과제 문화에 대해서도 문제 의식을 나타냈다. 정부 R&D 과제가 2016년 1만 2000여 개에서 올해 2만 4000여 개로 두 배나 늘었는데 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과기정통부가 도전적인 연구 문화를 강조하는 미국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DARPA) 시스템을 참고해 내년에 한국형 DARPA를 만들기로 했는데 과연 연구비의 선택과 집중에 대해 연구계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고 하자 “우리는 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런 게 뒷받침되기 쉽지 않다. 자칫하면 아는 사람한테 과제를 줬다고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미국에서 성공한 제도라고 해도 신뢰의 문화가 없으면 어렵다”고 답했다. DARPA에서 인터넷 등 기념비적 연구를 많이 한 원동력이 역량이 뛰어난 프로젝트 매니저(PM)에게 자율권을 준 것인데, 과연 ‘위원회공화국’식으로 운영되는 한국 풍토에 잘 정착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DARPA에서 PM을 한 이평생 교수의 사례를 들며 “그가 ‘제 명예를 걸고 책임지고 연구 과제를 줬다. 위원회는 필요없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 장관은 “DARPA 과제를 많이 수주하는 미국 국방우주 R&D 벤처기업인이나 한국 대학에 근무하는 유태계 미국인이 ‘한국은 나눠주기식 R&D 문화가 팽배하다. R&D 포퓰리즘 아니냐'는 말까지 하더라’고 전하자 “깊이 고민하겠다”고 답했다.
반도체 특허를 국내외에서 100여 개나 갖고 있는 그는 대학이나 출연연 등이 특허 등 지식재산(IP) 전략을 잘 펴지 못하는 것과 관련해 “기관의 책임자가 좀 더 관심을 갖고 봐야 하는데 그렇게 안되는 게 아쉽다”며 “발명자와 윈윈할 수 있는 모양도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이 장관은 5G 중간 요금제에 대해 “통신사와 협의 중으로 3분기(7~9월) 중 출시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5G의 커버리지도 연내 전국 85개 시 모두로 확대하고 농어촌은 2024년 상반기까지 5G 공동이용망을 구축하겠다고 했다.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 간 소송으로 시작된 국내 망 사용료 이슈에 대해서는 “(네이버 등) 국내 CP들이 해외 CP가 망 이용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소송 경과도 참고하고 국회의 여러 관련 법안 논의에도 적극 참여하겠다”고 했다. 온라인 플랫폼 기업에 대한 규제 이슈에 대해서는 “건전한 성장과 혁신을 유도하기 위해 민간 주도의 자율 규제 기구 설립·지원을 위한 법안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he is…
△1966년 경남 합천 △경북대 전자공학과 학사 △서울대 대학원 전자공학과 석·박사 △1993~1994년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연구원 △1994~2002년 원광대 전기공학부 교수 △1994~1998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초빙연구원 △1998~1999년 미국 MIT 마이크로시스템기술연구소 박사후연구원 △2002~2009년 경북대 전자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 △2009년~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2016년~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석학회원 △2018~2022년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