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 40년 만에 찾아온 고(高)인플레이션 위기에서 물가안정을 정책 목표로 하는 한국은행의 물가 전망이 연달아 빗나가고 있다. 국내 물가에 크게 영향을 주는 국제유가 흐름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은데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중국 봉쇄조치 등 각종 변수로 불확실성마저 커졌기 때문이다. 이에 한은은 지난해 8월부터 10개월 동안 물가 전망을 9번 상향 조정했다. 인플레이션 예측에 실패한 미국보다 나은 수준이지만 한은의 물가 전망이 통화정책은 물론이고 경제주체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는 만큼 정확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 조사국은 매년 2월, 5월, 8월 11월 금통위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마다 경제성장률과 함께 물가 전망치를 발표한다. 금통위원들은 통방회의 전날 동향보고회의를 통해 국내외 경제동향 및 평가 또는 경제전망에 대한 토의를 진행한다. 한은의 성장률과 물가 전망이 통화정책을 결정하는데 주요 판단 근거가 되는 셈이다.
한은은 2020년 11월부터 2022년 물가 상승률을 전망하기 시작했다. 당시 1.5%로 봤으나 물가가 현 수준만큼 높아질 것으로 예측하기 어려웠던 시점인 만큼 2021년 2월엔 다시 1.4%로 낮췄다. 이후 5월에도 1.4%로 예상한 뒤 기준금리를 0.50%에서 올리기 시작한 8월 금통위에서 1.5%로 0.1%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8월 금통위까지만 해도 물가보다는 가계부채 증가와 집값 상승 등 금융불균형 누증이 금리 인상의 주요 근거가 됐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해 9월 2.4%에서 10월 3.2%로 한 번에 0.8%포인트나 오른 이후다. 물가가 3%대로 접어들면서 인플레이션 우려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한은의 물가 전망 수정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물가를 두고도 한은은 2월 1.3%, 5월 1.8%, 8월 2.1%, 11월 2.3% 등으로 매번 올렸다. 2021년 연간 물가는 지수 개편으로 0.1%포인트 상향 조정돼 2.5%로 최종 집계됐다.
올해 물가 전망도 수시로 수정됐다. 지난해 11월 경제전망에서 2.0%로 예상했다가 한 달 뒤 물가 설명회 때 2%대로 소폭 상향 조정했고, 올해 1월 통방회의에서 다시 2%대 중후반대가 될 것으로 봤다. 올해 첫 경제전망이 나왔던 2월은 3.1%를 제시했다. 문제는 발표 당일인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다. 전쟁 이후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1%(3월), 4.8%(4월), 5.4%(5월) 등으로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한은은 3월 물가가 4.1%로 나오자 다시 긴급 물가 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3.1%를 크게 웃돌 것이라 상향 조정했다.
이어진 4월 금통위서 주상영 금통위 의장대행은 연간 물가가 4%에 근접할 것으로 봤고, 결국 한은은 5월 경제전망에서 4.5%를 제시했다. 2008년 7월(4.8%) 이후 13년 10개월 만에 가장 높은 전망치다. 이마저도 한 달 만에 다시 고쳐 잡았다. 21일 한은은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에서 “올해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08년 수준(4.7%)을 넘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며 전망치를 4주 만에 0.2%포인트 이상 상향 조정했다. 26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를 넘는다고 한 만큼 추가 조정이 이뤄질 가능성이 남아있다.
한은이 물가 전망을 매달 바꿀 수밖에 없는 것은 빠르게 뒤바뀌는 국제 정세와 이로 인한 국제유가 급변동과 맞물려 있다. 우리나라는 원유 의존도가 큰 만큼 국제유가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크기 때문에 유가 예측이 물가 전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한은 분석 결과 5월 물가 상승률의 해외 요인 기여율은 56.2%로 나타났다. 물가 상승률의 절반 이상이 에너지 원자재, 국제 식량, 공급망 차질 등 해외 요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유가는 하루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국제유가는 올해 1월 1일부터 2월 23일까지 평균 배럴당 87달러에서 전쟁 직후인 2월 24일부터 6월 17일까지 109.6달러로 26%나 뛰었다. 6월 이후로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로 급등하면서 한은도 연간 물가 전망을 다시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국제유가는 글로벌 침체 우려에 다시 급락했다.
국제유가는 관련된 변수가 많고 하나하나가 예측하기 쉽지 않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결정, 지정학적 위험, 개발 비용, 기상여건 등 공급 측 요인과 경제성장률, 운송, 산업 구조 등 수요 측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환율이나 재고 등 다른 변수도 감안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국제유가 전망을 신의 영역이라고 부를 정도다. 지난해 말 유가가 75달러 수준일 때 모건스탠리(배럴당 88.8달러), 골드만삭스(85.0달러), 미국 에너지정보청(70.6달러), 국제에너지기구(67.7달러) 등 글로벌 기관 대부분이 올해 유가 전망에 실패했다.
다만 물가가 국제유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만큼 한은이 지난해부터 나타난 글로벌 공급망 차질이나 애그플레이션(곡물 가격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조짐 등을 과감하게 반영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이 사용하는 전망 모형은 물가가 오르거나 내렸을 때 요인을 분석하는 데 특화돼있는 만큼 물가 예측치의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금통위서도 물가 전망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1월 금통위 의사록에 따르면 한 금통위원은 “물론 지난해 하반기 이후 한은이 물가의 상방 리스크가 상당하다는 점을 꾸준히 알려 왔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당행의 물가 전망이 후행적(behind the curve)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다”라면서 “앞으로 물가 경로의 상단을 좀 더 열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라고 발언했다.
이후 4월 금통위서도 “미국, 유럽 등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지난 1년간 물가 전망에 시행착오를 겪어 온 가운데 한은이 주요국에 비해 그 정도가 덜하기는 했지만 물가 전망을 후행적으로 상향 조정해 온 측면이 없지 않다”라며 “물가에 대해 보다 깊게 고민하고 분석해나갈 필요가 있다”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5월 금통위 땐 한은이 물가 전망치를 3.1%에서 4.5%로 1.4%포인트나 높였지만 일부 금통위원은 이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 ‘조지원의 BOK리포트’는 국내외 경제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경제학계 전반의 소식을 전하는 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