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사태 후폭풍이 ‘암호화폐판 리먼브라더스 사태’에 빗대어지는 것을 두고 역설적 상황이 발생했다는 말이 나온다. 리먼 사태와 그로 인한 2008년 금융위기가 바로 암호화폐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드러난 전통 금융의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며 등장한 암호화폐가 이를 답습하듯 줄파산 위기에 처하면서 암호화폐 시장의 아이러니가 부각되고 있다.
최초의 암호화폐인 비트코인(BTC)이 탄생한 건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0월이다.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익명의 개발자가 내놓은 ‘비트코인: 개인간 전자화폐 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이라는 논문이 시초다.
이 논문에서 그는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순수하게 개인간거래(Peer-to-Peer·P2P) 방식으로 거래할 수 있는 전자화폐 시스템을 소개한다. 이때 P2P 거래 과정에서 이중 지불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들고 나온 것이 바로 블록체인 개념이다.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트코인 논문이 세상에 등장한 이래 비트코인을 이어 수많은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시스템을 고안한 이유는 금융기관에 의존하는 기존 금융 시스템의 태생적 결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비트코인 논문 서론에서 그는 “나는 비트코인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오픈소스 P2P 전자화폐 시스템을 개발했다. 모든 것이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가 아닌 암호화 된 증명에 기반한 완전 탈중앙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첫 단락에선 “인터넷 상거래는 전자 결제를 처리하기 위해 신뢰 받는 제3자의 역할을 하는 금융기관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다”며 “이런 시스템은 대부분의 거래서 충분히 잘 작동하지만 신뢰 기반 모델의 태생적 결점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전통 금융 시스템에 반기를 든 비트코인의 정신은 계속해서 강조됐다. 논문이 발표된 이듬해 1월 생성된 비트코인 제네시스 블록(블록체인의 첫 번째 블록)엔 “2009년 1월 3일: 더 타임스, 은행들의 두 번째 구제금융을 앞둔 U.K. 재무장관”이라는 문구가 기록됐다. 금융위기 여파로 파산 위기에 처한 금융기관들에 대한 구제금융이 이뤄지던 2009년 1월 3일자 런던 타임스지 1면에 실제로 게재된 헤드라인이다. 금융위기를 촉발한 금융기관이 결과적으론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게 되는 시장 구조에 대한 비판을 내포한다. 비트코인 최초의 블록에 이 문구를 넣으면서 기존 금융시장의 대안으로 등장했다는 정체성을 더욱 확실히 한 것이다.
전세계적인 금융위기 상황에서 시장의 불합리한 구조를 전면 비판하면서 등장한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시스템에 대한 호응은 뜨거웠다. 비트코인이 탄생한 지 십여년 만에 탈중앙화금융(DeFi·디파이)와 대체불가토큰(NFT) 등 다양한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가 흥행했다. 암호화폐 시장도 승승장구해 BTC가 한때 6만 8000달러까지 치솟고 대안적 금융자산의 지위를 굳히며 ‘디지털 금’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5월 테라 사태로 암호화폐 시장이 폭락하고 여러 업체들이 줄파산 위기를 맞으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반전된 모양새다. 역설적이게도 테라 사태가 암호화폐 시장에 몰고 온 파장이 비트코인의 탄생 계기가 됐던 2008년 금융위기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블룸버그 통신은 “많은 사람들이 조폐국, 상업은행, 주식 시장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던 테라 프로젝트의 몰락을 ‘암호화폐 업계의 리먼 모멘트’라고 부른다”며 “리먼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실패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 결국 구제될 것’이라는 안일함이 원인이 됐다"고 테라 사태를 ‘암호화폐판 리먼 사태’로 진단했다.
이에 미래 대안 자산으로 등장한 암호화폐가 결국 한계에 봉착한 것 아니냐는 회의론도 떠오르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한 베스트셀러 ‘블랙스완(Black Swan)’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암호화폐 시장이 잠시 침체기를 맞았음을 뜻하는 ‘암호화폐 겨울(crypto winter)’이라는 용어엔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며 “겨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봄이 뒤따를 것을 암시하는데 겨울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 영구적이고 피할 수 없는 빙하기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암호화폐 회의론자로 꼽히는 그는 이전에도 암호화폐를 ‘역사상 가장 취약한 자산’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비판해왔다. 지난해 7월 발표한 논문에서 그는 “비트코인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통화,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비, 안전한 투자라는 개념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며 “금융 역사상 비트코인만큼 취약한 자산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