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플레이션, 광폭 금리 인상, 경기 침체가 동반되면서 시장 상황은 시계 제로다. 우리나라가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했지만 미국이 이번 주에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 이상의 추가 긴축을 할 것으로 보여 자본 유출 가능성 등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김태준 전 한국금융연구원 원장은 25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외국인 자본 유출에 대한 근본 대책은 경제 펀더멘털(기초 체력)을 강하게 하려는 한국 정부의 정책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환율 흐름 자체를 바꾸려는 당국의 과도한 개입으로는 달러 실탄만 날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을 지낸 김 전 원장은 “한미 통화 스와프는 경제·안보 동맹 차원에서 미국을 설득하면 가능할 것”이라며 “일본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하면 한일 관계 개선의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에 따른 경기 둔화가 2~3년 이어질 것”이라며 “가계는 빚을 갚기 위해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투자를 보류하는 ‘일본형 불황’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전 원장은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규제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규제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을 깨기 위해 부총리급의 ‘규제개혁위원회’를 행정부 별도 부처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은행의 빅스텝에 이어 미국은 큰 폭의 추가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창용 한은 총재가 연말 2.7~3% 기준금리를 ‘합리적 예상’이라고 했는데 복병이 생길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이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9.1%로 나오자 울트라스텝(1.0%포인트 금리 인상)이 거론되기도 했다. 미국이 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하면 한미 금리 역전에 따른 자본 유출 등의 문제가 생긴다. 이달 울트라스텝이 아니어도 다음 달 이후 긴축이 또 빨라지면 우리도 인상 폭을 올려 보조를 맞춰야 한다. 3% 초반 금리까지도 예상할 수 있다. 한은이 충분히 포워드가이던스(사전 방향 제시)를 해야 충격을 줄일 수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경기 침체 정도 등 세계 경제 상황이 불확실해 신중하지 못한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경우 경기를 죽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한은이 훨씬 힘들어질 것이다.
-자본 유출을 최대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한미 금리 역전에 따른 외국 자본의 부분 이탈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관건은 지속 여부다. 과거 한미 금리 역전이 있었지만 자본 유출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가 3번 있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 경제에 대한 외국투자가들의 신뢰 때문이다. 외국인들에게는 단순 금리 역전보다 기업 경쟁력을 위해 펀더멘털을 강화하려는 한국 정부의 의지가 핵심 투자 요소다.
-외환보유액 감소 속도가 빠르다. 지난달에만 94억 달러가 줄었다.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 외채 비중이 1분기 현재 38.2%다. 아직 위험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돈 있는 사람들이 심리적 불안 때문에 달러로 바꾸려 하면 ‘외화 런’이 생기는데 그런 상황은 아니다. 정부가 환율 상승을 제어하기 위해 과도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개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환율 수준의 흐름 자체를 끌어내리려 해서는 안 된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최근 한국을 방문해 추경호 경제부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필요 시 외화 유동성 공급’에 합의했지만 한미 통화 스와프 발표는 없었다.
△통화 스와프는 여유 있을 때 해야 효과가 있다.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이다. 지금 스와프 협정을 체결하면 든든한 안전판을 마련했다는 인식을 준다. 한국과 미국은 반도체 등 경제·안보의 전략적 동반자다. 그런 면을 강조하면 미국과의 스와프는 잘 이뤄질 것이다. 한일 통화 스와프도 필요하다. 한일 관계가 새 국면으로 전환하려는 과정에서 통화 스와프 협정은 관계 개선의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
-금리 인상과 함께 경기 침체 공포가 고조되고 있다.
△미국은 2차 오일쇼크 이후인 1979년 물가 상승률이 13.3%였다. 급격한 금리 인상 이후 4년이 흐른 1983년에야 (물가가) 2.4%로 내려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도 미중 갈등에 따른 서플라이체인(공급망)의 불안정성으로 인플레이션이 지속될 수 있다. 금리 인상은 경기 희생을 담보로 한다. 물가 안정까지 2~3년은 걸릴 것이다. 그사이 경기 둔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가계와 기업의 부실이 걱정이다.
△부동산 값이 오르자 집을 샀는데 가격이 떨어져 자산보다 부채가 큰 상황에서 ‘대차대조표 불황’이 발생한다. 소득이 생겨도 빚을 갚는 데 쓰면 소비는 줄어든다. 기업도 고금리 때문에 투자하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일본형 불황의 본질인데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다. 정부는 재정을 이용한 취약 차주 지원을 우선순위 정책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다만 과도한 포퓰리즘은 경계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엔데믹으로 바뀌는 1~2년 후 부실 기업은 퇴출해야 한다.
-부실과 관련해 우려되는 것이 부동산 경착륙 문제다.
△경착륙으로 시장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거래는 활성화해야 한다. 수요 진작을 위해 거래세 등 세제를 바꿔야 한다. 부동산 세제가 혼란스럽다. 예측 가능하도록 만들고 종합부동산세도 현실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세금을 한 번에 확 올려서는 안 된다. 주거 안정 차원에서 민간 임대 사업을 활성화하고 일관된 재개발·재건축 정책을 펴야 한다.
-몇몇 금융회사의 건전성에 좋지 않은 신호가 보인다.
△금융사 스스로 스트레스테스트를 실시해 대손충당금 문제를 해결하게 해야 한다. 코로나19 대출 상환 유예가 풀리면 연체율이 올라갈 것이다. 배당보다 금융 안정이 중요하다. 대손충당금뿐 아니라 대손준비금도 늘리도록 당국이 유도해야 한다. 증권사 등이 프로젝트파이낸싱(PF) 금융을 많이 하는데 부동산 시장이 침체될 확률이 높아 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금감원이 선제적으로 위험을 조사하고 충당금을 쌓게 해야 한다.
-경기 침체 과정에서 재정 확대 유혹이 또 있을 수 있는데.
△더 이상의 재정 확대는 안 된다. 재정 총량은 유지하되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는 등 지출 구조를 재정비해 어려운 사람에게 선별 투입하는 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출을 효율화해야 한다. 현 정부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공공기관 지출 축소다.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인프라에 재원을 투입하는 것도 필요하다. 반도체·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에 집중해야 한다. 고령화로 고령층의 복지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다. 지금 재정을 조절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다. 당장 재정 준칙을 만들어야 한다.
-재정 없이 경기를 띄우려면 규제 개혁이 필수다. 역대 정부는 규제 혁파를 외치면서도 외려 규제를 늘려놓았다.
△규제 개혁이 안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규제 자체가 공무원의 힘이다. 기득권을 내려놓는 게 어렵다. 견고한 규제 개혁 저항 세력을 깨려면 현행 규제개혁위원회를 정부 조직 체계 상 위원장이 부총리급인 행정위원회로 만들어 다른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야 한다. 각 부처의 규제를 위원회에서 자체 검토한 뒤 국무회의에 올리는 것이다. 위원장은 민간이 맡아야 한다. 관료가 하면 네트워크 때문에 진전되기 어렵다. 규개위에서 모든 규제를 5년 단위로 검토하고 존속 여부를 따져야 한다. 강대국의 흥망을 보면 개혁하지 못한 국가는 쇠퇴하거나 망했다. 국가 내부의 자체 동력으로 개혁해야 선진국으로 나아가고 기업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의원입법에 따른 규제들이 너무 많다. 국회의장 산하에 규제 억제 검토 기구를 만들어 개별 입법들의 규제 효과를 봐야 한다.
-구조 개혁도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연금·노동·교육 세 가지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공공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양보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연금을 개혁하려면 공무원연금 등 직역연금부터 개혁해야 한다. 노동 개혁은 대기업 노조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저항을 줄이려면 사회 지도층이 범국가적 혁신과 사회적 합의를 촉진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범국민 기구의 제안을 대통령이 수용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추진하되 장기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은 끊임없이 국민과 소통하면서 비전을 제시해 설득하고 개혁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구조 개혁은 잠재성장률과 연결된다. 금융연구원은 2030년 0%대 성장을 점쳤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총요소생산성을 높여야 하는데 핵심이 기술이다. 대학 교육이 중요하다. AI 학과 교수 중 AI 전공자가 거의 없다. 실리콘밸리에 가면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는 고급 인재를 영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대학이 인재 영입 여건을 마련할 수 있도록 산학 협동을 강화하고 재정적으로 견실해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대학 운영 자율권도 대폭 확대하고 대학 스스로 구조 개혁을 하게 해야 한다. 동시에 지방 9개 거점 국립대에 재정을 대폭 투입해 특정 분야에서 초일류대 수준이 되도록 적극 육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거점 국립대들이 인재를 양성할 수 있고 해당 분야 기업이나 연구소 등이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게 되니 지방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것이 지방 균형 발전을 위한 핵심 방안이다.
◆He is…
1955년 인천에서 태어나 경복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을 거쳐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와 부총장을 역임했다.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한국금융연구원 원장,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 대행,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산업은행 리스크관리위원회 위원장, 동반성장위원회 위원 등을 두루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