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권력 서열 3위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행을 앞두고 중국의 군사 도발 가능성이 고조되면서 대만해협을 둘러싼 미중 간 군사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중국에서 ‘격추’ 경고까지 나올 정도로 강경한 반응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 해군이 대만과 가까운 필리핀해에 항공모함 등 전함 4척을 배치하는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면서 아시아 증시도 크게 흔들렸다.
2일 대만 자유시보 등 현지 언론들은 펠로시가 이날 밤 타이베이 쑹산공항에 도착해 이튿날인 3일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만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펠로시는 전날 싱가포르에 이어 이날 말레이시아를 찾으며 아시아 순방 일정을 이어갔다.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1997년 이후 25년 만이다.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뉴트 깅그리치는 중국 베이징·상하이를 방문하고 며칠 뒤 타이베이를 찾아 3시간가량 머물렀지만 중국은 항의 성명만 냈을 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반응은 그때와 전혀 다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통화할 당시 펠로시의 대만 방문을 겨냥해 “불장난을 하면 스스로 타 죽는다”는 거친 발언을 날렸다. 2일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펠로시가 대만을 방문한다면 “결연하고 강력한 조치를 취해 주권과 안보 이익을 수호할 것”이라고 재차 경고했다.
중국이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우선 ‘타이밍’이다. 중국은 시 주석의 3연임이 확정될 20차 당대회라는 중요한 정치 행사를 앞두고 어느 때보다 내부 긴장도가 높은 상황이다. UC샌디에이고대 21세기중국센터 의장인 수전 셔크는 "지금은 중국의 국내 정치가 매우 긴장돼 있는 시기"라며 "시진핑 자신은 물론 중국 엘리트들도 펠로시의 방문을 시진핑과 시진핑 리더십의 굴욕으로 여길 것이므로 그는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반응해야만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대만을 찾는 사람이 다름 아닌 펠로시라는 점도 중국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요인이다. 펠로시는 1991년 당시 하원의원 자격으로 베이징을 방문해 톈안먼 사태로 숨진 시위대를 기리는 내용의 현수막을 펼치며 시위를 벌였고 이후에도 달라이라마와 교류하며 티베트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 등 중국의 인권 침해를 누구보다 강도 높게 비판해온 인물이다. 이를 이유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올림픽 유치도 반대하면서 중국 정부의 ‘공공의 적’이 됐다.
중국 당국과 관영 매체는 당장 군사력 동원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환구시보는 중국이 가오슝을 향해 둥펑미사일을 발사했던 1996년의 대만해협 사태를 거론하며 같은 역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공산당의 입 역할을 하는 후시진 전 환구시보 편집장은 트위터에서 “만일 미국 전투기가 펠로시를 호위해 대만에 진입한다면 이는 중국 영공 침입”이라며 격추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전날 대만 서남부 방공식별구역(ADIZ)에 전투기를 진입시키며 무력시위에 나섰던 중국 해사국은 남중국해 4개 해역과 그 접속 수역에서 닷새간의 군사훈련을 예고하기도 했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중국 군용기들이 중국과 대만의 실질적 경계인 대만해협 중간선까지 근접 비행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대만해협을 둘러싼 안보 위기가 고조되면서 이날 홍콩 항셍지수와 중국 상하이종합지수가 2%대의 낙폭을 보이는 등 아시아 증시는 일제히 하락 마감했다.
다만 중국이 군사조치를 시행할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싱가포르 국립대 리콴유스쿨 방문연구원인 드루 톰슨은 “20차 당대회를 앞둔 시진핑에게 지금은 군사 충돌을 일으킬 좋은 시기가 아니다”라며 이번 이슈를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시 주석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시인홍 중국인민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중국이 대만해협 위기 이후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백악관은 중국에 무리한 대응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1일(현지 시간) "중국이 (펠로시의) 잠재적 방문을 일종의 위기나 갈등으로 발전시키거나 공격적 군사 활동을 늘리기 위한 구실로 삼을 이유는 없다"며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한 선례가 있으며 하원의장의 방문 가능성으로 현상이 바뀌는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미국도 경계 수준을 높이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미 해군이 로널드레이건호 등 전함 4척을 필리핀해에 배치했다고 해군 당국자를 인용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