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기업의 상반기 재고 규모가 60%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전쟁부터 글로벌 경기 긴축, 인플레이션 등 큰 암초들을 만나며 주력 수출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결과다. 경기 둔화 시기에 재고자산이 늘면 투자 위축, 신규 생산 축소로 이어져 기업 이익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대기업 매출 비중이 큰 중소기업의 앞날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서울경제가 국내 매출액 상위 20위권 기업(지난해 말 기준)의 연결 기준 반기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해당 기업들의 6월 말 기준 재고자산은 213조 1633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134조 6804억 원) 대비 58% 증가한 규모다. 1년 만에 90조 원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2년 전인 2020년에 비해서는 무려 78.8% 급증했다.
삼성전자(005930)는 처음으로 재고자산이 50조 원을 넘어섰다. 전년 대비 55% 증가했다. 반도체 투톱인 SK하이닉스(000660)의 재고자산은 전년 대비 90% 불어나면서 10조 원을 돌파했다. 재고자산은 반도체뿐 아니라 디스플레이·에너지 등 국내 주요 제조·수출 업종에서 급증했다. 현대중공업지주(HD현대(267250)·159.3%), SK이노베이션(096770)(129.3%), SK(034730)(105.2%)는 전년에 비해 재고자산이 두 배 넘게 늘어났다. S-OIL(85.2%), 삼성물산(028260)(77.3%), LG디스플레이(034220)(73.4%) 역시 70% 넘게 증가했다. 현대차(005380)·기아(000270)는 증가율이 각각 20.5% 12.9%에 머물면서 상대적으로 양호한 재고자산 규모를 보였다.
재고자산 급증이 기업의 소극적인 투자, 가동률 축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작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재고가 급증하면서 기업의 현금흐름이 악화돼 신규 투자 위축, 생산량 감소로 이어지면서 전반적인 경기가 위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실제 삼성전자의 영업활동현금흐름은 전년 동기 대비 5% 넘게 감소했다. 금리 인상의 타격을 크게 받은 네이버도 92%나 감소했다. LG에너지솔루션·LG화학·SK바이오사이언스 등은 오히려 마이너스로 돌아서면서 현금이 유출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늘어난 재고자산이 현금흐름 악화에 이어 신규 생산량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는 징조도 포착된다. 기업들은 2분기부터 생산라인 가동률을 낮추고 있다. 삼성전자는 1분기 80% 수준을 유지하던 영상 기기와 휴대폰 부문 가동률을 70% 초중반대까지 낮췄다. 포스코홀딩스의 철강 부문 가동률도 88.3%에서 87.2%로 낮아졌다. LG전자 역시 모니터 부문의 가동률이 135.1%에서 117%, LG이노텍의 카메라모듈 가동률은 59.9%에서 50.9%로 크게 줄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재고자산 증가는 기업 입장에서 최악의 시그널인 셈”이라며 “앞으로도 인플레이션·긴축·고환율 등 3중고로 전방 수요가 크게 줄어들면서 위기에 놓이는 기업들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신규 투자와 생산량을 줄이는 대기업이 점차 증가하면서 이들을 고객사로 둔 중소기업부터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기업향 매출이 크게 감소하면서 불황을 견딜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들부터 생사의 기로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대기업은 보유하고 있는 현금 규모가 어느 정도 돼 불황을 견딜 수 있어도 중소기업은 위기 대비가 너무나 취약하다”며 “대출 만기 연장부터 시작해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