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스포츠 문화

'역사의 상흔' 걷어내니…1400년 석탑에 새 숨결이

■익산 미륵사지 관광지 재개장

백제 중흥기 담은 '서동 설화' 배경

동탑 새로 짓고 서탑 해체후 재조립

석탑속 유물 설화 반대 내용도 담겨

안내소·광장·주차장 등 16년간 공사

편의시설 더해 현대식 관광지로 변신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석탑을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이 1400년을 버텨오다 이번에 해체·재조립된 '국보' 서탑이고 왼쪽은 1992년에 추정 복원된 동탑이다.전북 익산시 미륵사지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석탑을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이 1400년을 버텨오다 이번에 해체·재조립된 '국보' 서탑이고 왼쪽은 1992년에 추정 복원된 동탑이다.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와 관련된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온다. 이야기에 따르면 백제의 서동이 신라에 와서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꾀어냈고 두 사람은 백제로 돌아가 국왕(무왕·재위 600~641년)과 왕비가 됐다. 선화공주는 큰 절을 세우기를 원했는데 무왕이 이를 따랐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했다.



그런데 2009년 미륵사지(미륵사터) 석탑을 해체·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영기가 발견됐다. 절을 세운 과정의 기록이다. 1400년 만에 빛을 본 이 글에서는 미륵사 창건의 주역이 무왕의 왕비로서 백제 내 최고 직위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임을 밝히고 있다. 신라 선화공주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창건 연도는 639년으로 확인됐다.

결국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전한 삼국유사의 주장이 의심받게 됐다. 물론 미륵사 창건을 주장한 것이 꼭 선화공주가 아니더라도 이것이 선화공주 자체의 부존재 근거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이래저래 미륵사는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국립익산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보수 전의 미륵사지 석탑(서탑) 모형.국립익산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보수 전의 미륵사지 석탑(서탑) 모형.


익산시가 미륵사지 관광지를 재개장했다는 소식에 20일 이곳을 찾았다. 2006년 시작한 공사가 16년 만인 이달 7일 완성돼 공개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미륵사지 주변은 그동안에는 늘 공사장이었는데 깔끔하게 마무리된 것이 반가웠다. 관광안내소·주차장·광장 등이 단장돼 있다. 핵심인 국립익산박물관과 어린이박물관도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의 관람이 더 편해질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 관광지에 들어서면 정면에서 2개의 석탑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정면에서 오른쪽 석탑(동탑)은 완전히 없어진 것을 새로 만든 것이고 왼쪽 석탑(서탑)은 허물어지고 있던 기존 석탑 부분을 해체해 재조립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륵사지 석탑이라고 할 경우 서탑을 의미한다.

미륵사지의 주요 문화재로는 당간지주도 있다. 당간지주는 절의 깃발을 걸던 돌기둥을 말한다. 다만 미륵사 창건 때는 아니고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 설화를 뒤집는 내용이 담긴 서탑 '사리봉영기'.'서동과 선화공주' 설화를 뒤집는 내용이 담긴 서탑 '사리봉영기'.


사리봉영기는 사리호와 함께 서탑안에 보관돼 있었다. 박물관 설명 영상을 촬영한 것이다.사리봉영기는 사리호와 함께 서탑안에 보관돼 있었다. 박물관 설명 영상을 촬영한 것이다.



미륵사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다.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을 지하층에 만들었다.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함께 익산 지역에서 나온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뒤집는 ‘무왕과 사택적덕 딸’의 스토리를 새긴 금제 사리봉영기는 박물관 내 가장 앞부분에 전시돼 관람객들을 맞는다. 옆에는 어린이박물관도 있어 과거 생활 체험들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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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탑 역사에서 목조가 석조로 바뀌던 과도기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됐다. 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크다. 이런 규모가 1400년 가까이 여전히 제자리에 우뚝 서 있어 경이로움을 준다.

미륵사의 규모는 6만 5000㎡(약 2만 평)다. 미륵사는 백제 멸망 이후에도 중요 사찰로서 이어졌다. 통일신라·고려·조선을 거쳐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 미륵사에는 목탑 1개, 석탑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돌이 불에 탈 리는 없지만 절이 폐허가 되면서 마찬가지로 훼손됐을 것이다. 목탑 모형은 박물관 내에 있다. 최초 기록인 1910년 사진을 보면 서탑은 반쯤 허물어진 돌무더기다. 동탑은 흔적도 없다. 일제강점기에 이들 서탑 돌무더기를 시멘트로 덕지덕지 붙여 조립해 놓았다. 과거 미륵사지 석탑의 인상이다.

‘보물’인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인 미륵사지 당간지주


1970년대 이후 민족주의 부상과 함께 대대적인 문화재 복원 바람이 불었다. 원래 없던 동탑이 1992년 먼저 복원됐다. 다만 자료가 뚜렷하지 않은 채 추정만으로 2년여 만에 급조됐다고 비판을 받았다. 물론 장점도 있다. 신상품이어서 동탑 안으로도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숙원이던 서탑의 보수는 2001년에야 시작됐다. 돌들에 덮여 있던 시멘트를 제거하는 등 청소를 하고 하나하나 다시 쌓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완성까지 무려 20년이 걸린 셈이다. 다만 석탑의 외모가 생각보다 매끈해 관람객들에게 아쉬움을 준다. 박물관 측은 “해체·조립하는 과정에서 망가진 돌들은 아예 빼내고 다른 돌로 채웠다”며 “그래도 가능한 한 가장 비슷한 돌을 구해 대체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돌들의 80%는 원래의 것이라고 한다. 높이 14.5m, 폭 12.5m로 총무게는 1830톤이다. 조립 과정에서 탈락한 옛 돌들은 석탑 옆 야외에 따로 전시돼 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옛 돌들이 야외에 전시돼 있다.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옛 돌들이 야외에 전시돼 있다.


한편 미륵사의 ‘미륵’은 일종의 부처다. 불교사상에서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데 석가모니가 그렇고 미륵은 미래에 올 부처다. 무왕의 미륵사 창건은 즉 자신이 새로운 부처인 ‘미륵’이라는 과시에 다름 아니다. 백제 중흥을 시도했던 무왕이 삼국 간의 정치적·종교적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다만 백제는 미륵사 창건 21년 후인 660년 멸망하니 아이러니다. 미륵사상은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서 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글·사진(익산)=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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