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기 전까지 유럽에 대한 가스 공급을 재개하지 않겠다.”
러시아가 결국 정치적인 이유로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차단했다고 밝히며 노골적인 '에너지무기화' 본색을 드러냈다.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는 상황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주요 산유국 연합체인 OPEC+는 경기 침체 우려를 이유로 원유 감산을 발표하며 비교적 안정됐던 국제 유가를 끌어올렸다. 이란산 원유 공급 재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던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복원도 막바지 암초에 걸린 모양새다. 세계 중앙은행들의 긴축 행보로 물가가 정점을 지나고 있다는 기대감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에너지 시장에 쌓여가는 악재들이 다시 에너지 가격을 자극해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 불쏘시개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5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의) 펌핑에 문제를 일으킬 다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노르트스트림1을 통한 가스 공급을 완전히 재개하는 것은 서방의 러시아 제재 해제 여부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이 기술 결함이 아닌 정치적 이유에서 나온 조치임을 대놓고 인정한 발언이다.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은 지난달 31일 유지 보수를 이유로 사흘간 노르트스트림1을 통한 가스 공급 중단을 발표했지만 이달 2일 가스터빈에서 발견된 기름 유출을 이유로 무기한 전면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터빈 제조사인 지멘스에너지가 가스 공급 중단 없이 수리가 가능하다고 반박하면서 공급 중단 배경에 다른 이유가 있음을 짐작게 했다. 가디언은 "페스코프의 발언은 러시아가 가스 공급 재개의 대가로 유럽연합(EU)의 제재 해제를 강제할 의사가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러시아의 노골적인 보복으로 이날 유럽 천연가스 벤치마크인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10월물은 장중 전 거래일 대비 35%나 치솟았다가 약 17% 오른 244.5유로에 마감했다. 유럽 경제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면서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도 0.7% 내린 0.988달러까지 하락하며 20년 만의 최저치를 경신했다.
러시아가 가스 시장을 뒤흔들었다면 국제 원유 시장은 OPEC+의 감산 결정으로 요동쳤다. 이날 OPEC+가 10월 일일 원유 생산량을 이달보다 10만 배럴 줄이기로 결정하면서 브렌트유는 전 거래일 대비 2.92% 오른 배럴당 95.74달러에 마감했다. 국제 유가는 6월에 배럴당 116달러까지 상승했다가 하락 전환해 최근 안정세를 보였으나 OPEC+발 공급 위축으로 다시 불안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OPEC+는 경기 침체에 따른 초과 공급 우려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고유가를 유지하려는 산유국들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세계의 하루 원유 생산량이 약 4400만 배럴에 달하는 상황에서 10만 배럴은 공급에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감산에 나선 것은 유가 방어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조치라는 것이다. 시장 조사 기관 엔베러스의 빌 패런프라이스 석유·가스팀장은 "이번 발표는 OPEC 국가들이 유가 100달러에 익숙해졌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던 사우디아라비아가 감산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며 "OPEC+에 중요한 것은 수익 유지"라고 진단했다.
지지부진한 이란 핵 합의 복원 협상도 에너지 시장에는 악재다. 이날 주제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협상 과정에서의 자신감이 28시간 전보다 떨어졌다"며 협상 타결이 난항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FT는 "보렐 대표가 미국과 이란에 최종 협상안을 보낸 뒤 나온 가장 비관적인 발언"이라고 전했다. 협상 타결 시 이란산 원유가 시장에 풀리면서 증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진 셈이다.
에너지 수급이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유럽 각국은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한 급한 불 끄기에 나서고 있다. 블룸버그는 올겨울 유럽 정부들이 적어도 총 3750억 유로의 지원금을 가계에 풀 것으로 분석했다. 독일은 올해 말 가동이 중단되는 원자로 3기 중 2기를 내년 4월 중순까지 예비전력원으로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로베르드 하베크 독일 경제장관은 "독일은 탈원전 계획을 고수한다"면서도 "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말 이후 원전을 가동하지는 않되 겨울철 전력난에 대비해 예비전력원으로 남겨두겠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