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권력 다툼에 매몰되면 이상(理想)은 실종된다. 눈앞에는 오직 쟁취해야 할 ‘힘’만 보일 뿐 난관을 뚫고 이뤄내야 할 가치나 미래는 내팽개쳐지기 때문이다. 달리는 경주마가 돼 양옆에 닥친 위험 신호도 감지하지 못한다. 보여도 애써 무시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정치가 딱 그런 상황이라고 평가한다. 환란 이후 최악의 위기 신호가 동시에 몰아 치는데도 정치는 오직 권력을 좇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정치 평론가는 “권력을 놓고 싸우는 것이 정치의 생리라지만 정도가 심하다”면서 “노동·교육·연금 등의 구조 개혁은 물론 민생, 미래 먹거리에 대해 말만 쏟아낼 뿐 눈을 감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등 글로벌 슈퍼파워는 물론 경쟁 국가들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경쟁에 나선 상황과 너무 비교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렇다. 14일 정치권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가 대선 연장전 구도를 형성하면서 대선 당시의 이슈에 재차 불을 붙이는 프레임 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하자 정치 보복, 탄압으로 규정 짓고 김건희 여사 의혹 관련 특검 드라이브로 이슈 몰이를 하고 있다. 여당은 이에 맞서 이 대표에게 범죄자 프레임을 씌우며 전방위 역공을 펼치고 있다.
야당은 국회 과반 의석을 쥐고 법안·예산 심사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심산이다. 특히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법안'은 숙의 기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상임위에 상정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미래를 위한 협치보다는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데만 집중하는 탓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민생 제일주의를 말로만 외치면서 각자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여야의 내홍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총선 공천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당 대표 자리가 갈등의 중핵이다. 여당은 당 주류 세력과 이준석 전 대표 간 극한 투쟁으로 당은 물론 대통령의 지지율도 바닥을 치고 있다. 최 원장은 “모든 정권에서 초기 내부 파워게임, 권력 투쟁이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도가 세다”고 말했다. 민주당도 이 대표 사법 리스크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대표가 잇따라 기소되거나 유죄 판결이 나오기 시작하면 비명계가 당권을 흔들고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여야가 민생·협치 의지를 의심받는 것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양당의 협치 강화 조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일 이 대표와 만나 여야정 상설협의체를 제안했으나 별다른 답을 듣지 못했다. 또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와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각각 여야 공통 공약 추진 기구의 필요성을 언급했으나 후속 논의가 실종됐다. 앞서 김진표 국회의장이 제안한 국회 중진협의체는 한 달이 다 되도록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또 국민의힘이 반도체특별법을 발표하면서 국회 첨단산업특별위원회를 민주당에 제안했으나 이 역시 진척이 없다.
여야가 규제·노동·교육·연금 등 개혁 과제와 반도체특별법 등 미래의 씨앗을 뿌리는 법안 처리에는 대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된다. 정쟁 사안에 대해 여야가 한 발씩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를 정쟁화하지 말라는 지적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이 대표는 야당 대표라는 자신의 직분을 겸허히 돌아보고 정치 탄압 주장 등 정치공학을 펼 생각을 말아야 한다”며 “국민의힘도 ‘우리는 더 이상 수사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다’며 정쟁화를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또 민주당이 국회 과반 의석을 쥐고 법안 처리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민주당에도 역풍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최 교수는 “이렇게 하면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더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 대통령이 과단성 있는 민생 행보를 보여야만 여야 복합 갈등의 고리를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최 원장은 “대통령이 민생에 올인하고 성과를 낸다면 지지율이 오르면서 갈등의 실타래가 자동으로 풀리게 된다”며 "민생을 도와줄 대통령실 개편, 과감한 국정 쇄신 등 획기적인 방법으로 정국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