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로시간 제도는 엄격한 규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1일 8시간이라는 규제가 (대표적인) 쟁점입니다.”
국내 3대 노동학회 원로들이 29일 정부가 추진 중인 노동 개혁의 범위가 더 넓고 과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학계에서는 그동안 ‘공장 시대 노동법’이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고 다양한 근로자를 보호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다고 지적해왔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디지털 시대에 맞는 근로시간 규제 등 노동 개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다.
김희성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장(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이날 서울 중구 로얄호텔에서 열린 ‘노동 3대 학회 공동 토론회’ 공동 발제자로 나와 “미국은 1일 근로시간 규율이 없고 주 40시간을 초과하지 않으면 된다”며 “(한국도) 하루 8시간의 근로시간 상한을 규제하지 않으면 탄력적인 근로시간 편성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 학회장의 지적은 정부가 전문가 기구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에 맡긴 노동 개혁 과제에서 한 걸음 더 나간 제안이다. 고용노동부는 6월 미래노동시장연구회 출범 이후 주요 논의 과제로 연장 근로시간 단위를 ‘주’에서 ‘월’로 바꾸는 안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주52시간제의 틀 내에서 노사에 다양한 근로시간 선택권을 주자는 취지다. 하지만 다양한 유형의 유연근무제가 이미 마련된 만큼 이 정도 수준의 제도 개편으로는 실효성이 높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김 학회장은 “(연장 근로의) 월 단위 변경과 틀(하루 8시간)이 맞물리면 근로시간의 유연성이 높아지고 근로자 건강권도 확보된다”며 “영국처럼 하루 근로시간을 늘리고 줄여 주4일근무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노동학계의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참석자들은 특히 1953년 제정돼 현재까지 큰 변화가 없는 노동법의 한계를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통상임금처럼 노사가 기존 법보다 법원 판단에 기대고 갈등하는 상황을 언제까지 내버려둘 것이냐는 비판도 나왔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정부가 밝힌 노동 개혁의 출발점이다. 김 학회장은 “근로기준법의 획일적인 표준화와 일률적인 강행 규범화는 법적 불안정성을 만들었다”며 “추상적인 규범과 불명확한 문언 탓에 법원의 광범위한 해석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 장소에서 근무하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1950년대 공장 근로자를 위해 만든 근로기준법이 현재 노동 환경뿐 아니라 플랫폼 종사자,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등 다양한 유형의 근로자를 아우르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근로기준법 적용을 두고 노사가 법적 다툼을 벌이는 경우가 과거보다 늘고 있다. 플랫폼 종사자는 벌써 취업자의 10%에 육박한다. 토론자로 나선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도 “노동 규범은 새로운 경제사회적 환경과 노동시장 구성원의 일에 대한 인식 변화를 반영해야 한다”며 “플랫폼 종사자는 플랫폼의 통제권을 완화하고 이들의 선택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근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파업으로 고용부의 선결 과제가 된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이중구조는 원·하청 관계, 기업 규모, 고용 형태, 성별 등 노동시장이 두 층으로 나뉜 구조를 뜻한다. 이 중 임금 격차가 가장 심해 사회 양극화를 낳고 있다.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공형 임금 체계 대신 직무·성과 임금 체계를 확대하겠다는 방향도 맞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 원장은 “과도한 연공주의는 세대와 고용 형태 간 임금 격차를 확대하는 원인”이라며 “직무 가치 성과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게 공정의 가치에도 부합한다”고 말했다.
노동 개혁의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임금 체불 방지와 같은 노동 기본 질서를 먼저 바로 세우는 게 필요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토론회 공동 발제자인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근로시간 유연화 문제의 핵심은 근로시간이 아니라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로자 대표 제도의 개선”이라며 “근로자 대표 제도 개선 없는 근로시간 유연화는 기업의 사적 권력 확대에 기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근로자 대표는 노사 협상 과정의 대표 역할을 한다. 전체 사업장에서 노조 조직률이 14%인 점을 고려하면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 근로자 대표가 근로자의 권리를 지킨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격·선출·임기 등 여러 뒷받침 제도가 부실하다. 이날 토론회 참석자 모두 근로자 대표 제도가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면 노동 개혁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우려를 직간접적으로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