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등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공급망의 주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 등 동맹국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으로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경제 협력을 굳건히 할 것입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7월 방한 당시 서울 LG사이언스파크에서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만나 이같이 밝혔다. LG화학은 세계 2위 배터리 기업인 LG에너지솔루션을 자회사로 두고 배터리 소재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다. 옐런 장관의 발언에는 미국의 동맹이자 첨단 산업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을 보유한 우리나라의 투자처로서 강점이 집약돼 있다.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국빈 방문 후 첫 행선지로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 한국의 높은 산업 경쟁력은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업체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가 올 7월 경기도에 연구개발(R&D) 센터 신설을 확정한 게 대표적이다. AMAT가 R&D 센터에 수천 억 원을 투자하는 것은 결국 메모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등에서 반도체 업계를 선도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이런 반도체 장비 업체의 잇따른 한국 투자는 탈중국과 맞물려 새롭게 구축되고 있는 글로벌 가치 사슬이 어떤 형태로 구축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정민 숭실대 글로벌통상학 교수는 “아무래도 반도체·배터리 등 중국과 산업적으로 겹쳐 있는 부분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 기업은 유럽이나 일본 등과 달리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한국을 투자처로 선호할 수 있다”며 “특히 연구소나 제조 공장 인근에 어마어마한 수요처를 배후에 깔고 있다면 투자에 따른 장점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해외 투자를 유인할 한국의 강점으로 탄탄한 산업 경쟁력, 창의적인 인재, 지적재산권 침해 우려가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정적인 전력 등을 꼽는다. 중국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지난 8월에도 가뭄·폭염으로 인한 전력난이 발생해 반도체 생산 등이 차질을 빚었다. 중국의 지적재산권 보호 수준이 낮아 ‘베끼기’가 만연한 점도 글로벌 기업이 투자를 꺼리는 요인 중 하나다. 한국이 이런 점을 공략하면 중국에 실망하고 우방국에 새롭게 공장을 짓길 바라는 해외 기업 유치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한국이 콘텐츠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점도 투자를 유인하는 새 요인으로 꼽힌다. 넷플릭스의 자회사인 ‘스캔라인VFX’가 우리나라에 6년간 1억 달러(약 1300억 원)를 투자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스캔라인VFX는 미국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 특수 효과 제작 등을 담당한 곳으로 아시아에서 스튜디오를 여는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창의적인 인재의 산실로 한국을 기대하고 투자를 결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덕근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K콘텐츠 수출액이 14조 원을 돌파하는 등 한류 콘텐츠의 글로벌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이라 이런 투자가 가능했다”며 “(높은 인건비, 노동 규제 등) 투자에 난관이 없지 않지만 강점을 살려 나가면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탈중국 러시 가운데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서 인도가 필라1인 무역에서 빠지기로 한 점도 우리나라에는 반사이익이 기대되는 부분”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정치권이 규제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미국·유럽 등 우방국들이 제조업 부흥을 목표로 중국 등에 나가 있던 자국 기업의 유턴을 꾀하는 것은 물론 한국 등 해외 기업 유치에 혈안인 탓이다. 제임스 김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회장은 “지금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중심은 중국, 그중에서도 홍콩이었지만 미국이 프렌드쇼어링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 중심의 공급망 구축에 나서 한국이 새롭게 아시아의 중심이 될 기회가 왔다”면서도 “경직된 노동법 등에 대한 글로벌 기업의 우려가 큰 만큼 정부가 규제 손질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와 관련해 대한상공회의소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대응을 통한 투자 활성화 과제로 첨단 산업 유치 활성화, 국제 공동 R&D 프로그램 강화 등을 꼽았다. 신산업 유치를 위해 개인 정보 보호, 국경 간 데이터 이전 등 디지털 통상 규범 정립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2019년 우리와 소부장 분야에서 정치적 갈등으로 일본 기업들이 큰 피해를 봤던 당시에도 상당수 일본 기업은 한국으로 건너가 생산 공장을 만들었다”며 “이런 산업적 강점을 기반으로 기업이 독소 조항으로 여기는 규제 등을 신속히 제거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해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인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