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업계 반발로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던 이른바 '타다 사태'가 일어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국내 스타트업 업계는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다. 오히려 정부가 스타트업과 기존 업계 갈등을 미온적으로 처리하면서 문제는 커지고 있다.
지난 4일 정치권이 공인중개사를 한국공인중개사협회(한공협)에 의무 가입토록 한 공인중개사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직방·다윈중개 등 프롭테크(부동산 기반 정보통신기술) 업체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한공협은 ‘집을 파는 사람에게만 부동산 수수료를 받겠다’면서 여론 확보에도 나섰다. 법률 서비스 플랫폼 ‘로톡’과 세무 환급 서비스 ‘삼쩜삼’도 대표적인 충돌 사례다.
스타트업의 혁신 성장을 믿고 자금을 투자한 벤처캐피탈(VC)은 누구보다 이런 상황이 답답하다. 서울경제가 27일 만난 4명의 VC대표들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플랫폼 스타트업의 혁신성을 검증할 수 있도록 정부·정치권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양측의 눈치를 볼 게 아니라 툭 터놓고 혁신성을 객관적으로 검증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VC업계에선 ‘전문직’이 우위인 시장은 플랫폼 스타트업의 등장을 꺼리는 게 당연한 데 그 자체를 터부시 하는 게 문제라고 본다. 변호사나 의사, 세무사 등이 진입 장벽을 기반으로 정보 비대칭성과 높은 판매 단가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플랫폼 사업자들은 정보 비대칭성 해소를 사업 모델로 채택하고 있다.
정성인 프리미어파트너스 대표는 “로톡이 사업을 벌이고 있는 법률 자문 시장은 정보의 비대칭성이 굉장히 큰 시장”이라며 “이런 시장에선 공급자 단체들이 힘이 있고, 서비스 단가 하락에 대해 단기적으로 이해 충돌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진단했다.
VC 업계에선 플랫폼 스타트업이 장기적으로 전체 시장 성장과 소비자 효용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데에 주목한다. 강동석 소프트뱅크벤처스 부사장은 “우리는 플랫폼 스타트업의 서비스가 ‘고객을 위한 것’이라면 투자한다는 입장”이라며 “이런 서비스가 시장의 전체 파이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을 스타트업에서 입증한다면 기존 업권이나 정치권을 설득할 여지가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VC들은 정부·정치권이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면서 플랫폼 스타트업의 혁신 시도가 가로막히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 대표는 “기존 집단의 저항을 법이나 시스템으로 막는 선례를 만들면 새로운 분야에서 창업에 나서려는 사람들의 의욕이나 선택 범위는 좁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는 “별 일이 없으면 2~3년 만에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기업인데, 마찰이 생기면 투자금 회수 기간이 길어지고 가치 평가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며 “이런 회사들은 후속 투자 유치가 만만찮은 것은 물론이고 소송에 대응하면서 본업이 큰 피해를 본다”고 설명했다.
VC들은 정부와 정치권이 스타트업과 기존업계 간 ‘역학’에만 몰두하는 대신, ‘과학적’인 방법으로 플랫폼 스타트업의 성장 경로를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강 부사장은 “적어도 2~3년간 데이터를 축적해 기존 업권에서 가졌던 불안감이나 논리가 타당했는지, 실제로 문제는 무엇인지 논의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며 “테스트를 거쳐 새로운 결론이 도출 된다면 사회적으로도, 소비자들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VC 업계가 스타트업의 사회 기여도를 입증할 데이터를 만들자고 조언했다. 윤 대표는 “‘혁신은 창조적 파괴를 불러와 새로운 고용 창출을 일으킨다’는 명제는 많지만, 이를 숫자로는 증명할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다”며 “벤처캐피탈협회 등이 투자액 당 고용 창출 효과 등의 데이터를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남기문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의사단체에선 비대면 진료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환자들이 모두 대학병원으로 가게 된다고 걱정했는데, 원격 진단을 시범적으로 해보니 관련 의심이 많이 사라졌다”며 “시범적으로 일단 사업을 해본 뒤 부작용을 보완하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