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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양심에 털이 나도…

■ 윤동천 개인전 'Pairs 쌍-댓구'

글자 표면에 잔뜩 돋아난 털 등

우화·속담 소재로 현실 꼬집어

갤러리시몬서 내달 21일까지

윤동천 '새벽은 온다'. '닭'이라는 글자의 받침 윗부분을 비튼 형태다. /사진제공=갤러리시몬윤동천 '새벽은 온다'. '닭'이라는 글자의 받침 윗부분을 비튼 형태다. /사진제공=갤러리시몬




윤동천 개인전 'Pairs 쌍-댓구' 전시 전경. /사진제공=갤러리시몬윤동천 개인전 'Pairs 쌍-댓구' 전시 전경. /사진제공=갤러리시몬


‘닭’이라 써야 하는데, 받침 위 글씨를 뒤집어 적었다. 작품 제목은 ‘새벽은 온다’. 옳거니, 글자 윗부분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뜻이렷다. 그 옆에 걸린 은색 바탕의 작품에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가까이서 표면을 살펴보면 글자 위에 털이 잔뜩 돋아있다. ‘양심에 난 털’을 은유한다. 쓴웃음 짓게 하는 ‘풍자미술’로 유명한 개념미술가 윤동천의 신작들이다. 종로구 통의동 갤러리시몬에서 한창인 그의 개인전 ‘Pairs 쌍-댓구’에서 선보였다.




윤동천 '이상한'.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글씨 위에 털이 잔뜩 돋아있는 작품이다. /사진제공=갤러리시몬윤동천 '이상한'.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글씨 위에 털이 잔뜩 돋아있는 작품이다. /사진제공=갤러리시몬


윤동천의 '이상한'의 세부. /조상인기자윤동천의 '이상한'의 세부. /조상인기자


커다랗게 높이 걸린 북은 21세기형 신문고(申聞鼓)인 듯하다. 막상 두드려 본 북은 그러나 조용하다. 단단하게 느껴진 북 표면은 팽팽하게 당겨놓은 패브릭 소재라, 소리 없이 채를 튕겨낼 뿐이다. 그 옆에 붙은 문구 ‘정의는 강자의 이익’은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해 설전을 벌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시마코스가 남긴 말이다. “고등학생 때,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분노했었는데 이제는 강자에 의해 그때 그때 정의가 다르게 정의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윤 작가는 울리지 않는 북을 비롯해 머리가 맞붙은 망치, 다리가 묶인 선글라스, 마주 선 칫솔 등 대립과 소통 부재로 제 기능을 상실한 사물들을 층마다 배치했다.

윤동천 설치작품 '정의는 강자의 이익'윤동천 설치작품 '정의는 강자의 이익'



윤동천은 1990년대 다원주의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모더니즘 추상미술’과 ‘현실참여 민중미술’이 대립하던 1980년대를 지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한 문화변혁기를 관통하며 작가로 자리잡았다. 윤동천 만의 독자적 미학은 현실에 대한 날 선 비판의식을 가장 ‘미술답게' 보여주며, 대중과의 공감할 수 있는 유머와 풍자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빛난다. ‘한글’을 활용한 언어유희와 한국적 일상용품을 작품으로 끌어들인 점은 후배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상을 새롭게 혹은 낯설게 다시 보게 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역할이라고 할 때, 가장 탁월한 작가 중 하나로 윤동천이 손꼽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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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면 추상화로 보이는 1층 대작은 ‘블랙핑크’에서 출발했다. 이름 그대로 검정과 분홍이다. 그 옆은 파랑과 노랑, 하양·파랑·빨강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기임을 알아챌 수 있다. 위장용 군복 무늬인 카모플라쥬 배경 위에는 BTS라 적혔고, 빙하가 녹아가는 극지방 풍경이 나란히 놓였다.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끄는 ‘핫’한 소재지만 정작 대응은 ‘쿨’하기만 한 주요 이슈를 펼쳐놓은 윤동천 방식의 ‘리얼리즘’이다.

2층에는 ‘도처에 놓인 아름다움’이라는 주제 아래 코뚜레·호미·바구니 등을 간략하게 표현한 작품들이 셋씩 짝지어 전시됐다. 윤 작가는 “사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고정 관념을 버리면 요강도 도자기처럼 고와보일 수 있다”면서 “단순하고 하찮은 것이지만 기능을 배제한 그 형태만을 제대로 한 번 보자는 의도”라고 말했다.

3층 영상작업은 짝으로 나란히 함께 볼 때 그 의미가 증폭되는 사진들을 엮었다. 고대 석상에서 떨어져 나온 발 조각과 병실에 누운 환자의 발, 마구잡이로 뻗어난 식물 뿌리와 건물을 뒤덮을 정도로 치렁치렁한 전선, 삼계탕에서 추린 닭뼈와 잔뜩 쌓인 폐자전거 등 닮은 듯 다른 사진들을 함께 배치했다. 설명 없이 함께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구구절절하지 않기에 관객의 상상력이 증폭될 여지가 더 커진다. 30년간 서울대에서 후학을 키운 작가가 정년퇴임 후 처음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미술관 전시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작가가 모처럼 연 갤러리 전시이기도 하다. 12월21일까지.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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