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K칩스법(반도체특별법)’에서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 증원 내용이 제외됐다. 정부와 여당이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해 수도권 대학 규제 완화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이 지방 소외를 이유로 완강히 반대한 게 컸다. 여기에 정부도 슬그머니 후퇴 입장을 보이면서 인력 양성의 ‘핵심 열쇠’가 백지화된 셈이다. 4개월 넘게 표류하던 K칩스법이 추진에 속도를 내기는 했지만 결국 수도권 규제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위는 양향자 무소속 의원이 발의한 K칩스법에서 수도권 내 대학 정원 확대 조항을 삭제하기로 합의했다. 소위는 이 같은 내용의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의결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학과는 정원 규제를 벗어날 수 없게 됐다. 다만 김한정 민주당 의원안을 일부 수정해 ‘전략산업 등 관련 대학의 학생 정원을 조정’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이 그나마 숨통을 열어주게 됐다. 해당 조항에 의해 수도권 대학들은 정원 내 다른 학과 인원을 조절하면 반도체학과 정원을 늘릴 수 있다. 일종의 고육지책으로 해석된다.
법안 심사 과정에서부터 정부는 수도권 대학 정원 확대에 반대했다. 서울경제가 단독 입수한 산자위 심사 자료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지역 균형 발전 등 수도권정비계획법의 취지를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교육부 또한 대학 입학 정원은 수도권정비위원회 심의를 통해 변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별도 법에서 특례를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놨다.
특히 K칩스법 추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산업통상자원부도 이 같은 방안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산자위 관계자는 “산업부도 수도권 대학 정원 조항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다”고 말했다. 수도권 대학 정원 확대는 민주당이 지역 소외라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K칩스법의 핵심 쟁점이 됐다. 양 의원이 위원장을 맡은 국민의힘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가 어렵사리 당정의 협의를 강조하며 K칩스법을 발의했지만 법안 심사 과정에서는 정부 여당이 엇박자를 낸 셈이다.
반도체 특화 단지에 대한 운영 비용 지원을 의무화하는 조항도 좌초됐다. 양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특화 단지 조성·운영 및 입주 기관 지원에 대한 비용을 각각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의무적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기획재정부가 반대하면서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현행 규정을 유지하기로 했다. 특화 단지 조성 단계에서는 다른 법령에 따라 지원이 가능하고 강행 규정으로 할 때 탄력적 재정 운용을 제한한다는 게 기재부 측 설명이다. 다만 ‘지원할 수 있다’ 수준이었던 입주 기관에 대해서도 김 의원 안대로 ‘우선적으로’라는 문구를 추가해 지원 우대 범위는 보장하기로 했다.
특화 단지 인허가 등의 절차를 간소화하는 조항은 이견 없이 채택됐다. 특화 단지 인허가 등 처리 결과의 통보 기간은 15일로 단축된다. 처리 기간으로부터 60일이 지나면 인허가가 된 것으로 보는 김 의원안도 반영했다.
여야의 첨단산업특별법 합의로 연내 K칩스법 통과 가능성이 커졌지만 수도권 규제 완화에는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산업계에서는 대학 정원 확대 무산으로 반도체 인력 양성에 제동이 걸렸다는 성토가 쏟아졌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결국은 인력을 늘리자는 게 산업계와 학계의 절규인데 ‘지역 소외법’이라며 막아버렸다”며 “수도권·비수도권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전반적인 인력 풀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K칩스법은 올해 8월 양 의원안이 발의된 후 야당의 반대에 막혀 4개월째 논의가 부진했다. 최근 민주당이 자체 법안을 내놓으면서 여야가 접점을 찾았지만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 남아 있다. 반도체 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을 결정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두고는 여전히 여야의 견해 차가 큰 상태다.
현행법상 △대기업 6% △중견기업 8% △중소기업 16%인 세액공제율을 높여야 한다는 점에는 여야 모두 공감하고 있다. 양 의원 개정안은 이를 20%·25%·30%로 상향했고 김 의원 개정안은 10%·15%·30%로 올렸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기업에 대한 세액공제율 대폭 상향이 ‘대기업 특혜, 부자 감세’로 비쳐질 수 있다는 입장이라 협의에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