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2022 카타르 월드컵 재미있게 즐기고 계신가요. 우리나라 선수들은 월드컵 기간동안 참 많은 감동과 여운을 줬죠. 저는 포르투갈전 손흥민 선수의 어시스트와 황희찬 선수의 결승골을 하루에도 몇번이나 돌려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16강 브라질전 이후 한 네티즌께서 올려주신 흥미로운 문구를 하나 봤습니다. '우리나라가 축구로 브라질을 이긴다는 것은요. 마치 브라질이 반도체로 한국을 이기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말이었는데요. 그래서 상상했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 월드컵이 열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재밌지 않나요? 1년 동안 주요 반도체 국가 안에서 있었던 초대형 이슈들을 짚어보면서, 각 나라들의 반도체 국가 대표팀 경쟁력과 특징을 한번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송년회 자리에서 반도체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도 어디서 꿀리지 않을 만큼'의 정보를 선사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한국 대표팀부터 출발하겠습니다. 분량 압박이 상당합니다. 표와 그림 위주로 봐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 반도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한국 대표팀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걸출한 투톱이 있습니다. 이들은 중앙처리장치(CPU) 옆에서 데이터를 빠르게 기억하고 처리하는 D램·각종 정보를 반영구적으로 저장하는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분야 최강자들이죠. 삼성전자는 D램·낸드플래시 분야 1위,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 분야에서 각각 2위를 달리고 있고, 세계 시장 점유율을 합하면 70% 수준입니다. 특히 올해 11월 삼성전자는 V8(236단) 낸드 양산을, SK하이닉스는 8월 238단 낸드플래시 개발 성공을 알리며 200단 낸드 시대 진입을 알렸습니다.
삼성전자는 고객사들이 주문한 반도체를 대신 생산해주는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덩치를 키우고 있습니다. 올해 6월에는 초미세 3나노(㎚·10억분의 1m)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다고 알렸죠. 지난 2019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1위'를 달성하겠다고 선포했는데요. 그 중심축이 바로 파운드리 사업입니다. 현재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업계 2위입니다. 1위 TSMC와의 격차는 40% 이상입니다.
올해 한국 반도체 대표팀에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지난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평택 공장 방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재용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 바이든 대통령에게 직접 평택 3공장을 안내해 화제가 됐죠. 이 회장은 라인 내에서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KLA 등 장비들을 꼼꼼하게 소개하며 바이든 대통령과 공고한 반도체 동맹 의지를 다졌습니다.
이후 평택 공장은 세계 정상들이 방한 시 꼭 둘러봐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됐습니다. 바이든 대통령 방문 이후 독일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등이 11월 자국 반도체 업체 관계자들과 평택 라인을 시찰했죠. 한국 반도체의 상징이 된 평택 공장에 향후 어떤 이들이 방문해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논의할 지 지켜볼 대목입니다.
2022년은 국내 투톱의 존재감을 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 ASML 등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사들이 공급망 현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페터르 베닝크 ASML CEO는 지난달 화성 신규 사옥 발표와 함께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 윤석열 대통령, 이재용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동시에 만나 반도체 공급망 협력 의지를 다졌고요. 게리 디커슨 AMAT CEO는 지난 10월 윤석열 대통령을 용산 대통령실에서 만나 한국 R&D 센터 설립에 대한 의견을 나눴습니다.
다만 하반기부터 이어진 투톱 업체들의 전력 약화가 걱정입니다. 세계적인 물가·금리 상승으로 IT 수요가 부진하기 때문인데요. SK하이닉스는 4분기 적자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이 와중에 풍부한 자본력과 원가 경쟁력을 앞세워 메모리 분야에서 인위적인 감산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2010년대 독일 키몬다, 일본 엘피다 등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냉혹했던 '치킨게임'의 승자로 올랐던 삼성전자가 내년에 어떤 모습을 보일지 주목됩니다.
또 우리 대표팀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공격수를 갖추고 있는 팀이지만 후방이 상당히 약하다는 것입니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 기업, 즉 팹리스 분야 세계 점유율은 3% 미만에 불과합니다.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전체 반도체 시장의 60~70% 수준이라고 합니다. IT 시장 발전으로 어마어마한 기회가 있을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우리는 단 3% 내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뒷받침하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도 너무 열악합니다. 2019년 일본 수출 규제 이후 소부장 경쟁력이 땅끝까지 떨어져있다는 것을 체감한 우리는 각종 국산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다만 수십년 전부터 기초 기술과 자본을 쌓아온 극강의 외산 소부장 회사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20%에 불과합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국내 반도체 소재 국산화율은 그나마 나은 50.3%입니다. 허나 핵심 소재의 경우 해외 의존도가 아직 상당합니다.
그럼에도 국가 지원은 참 답답한 부분입니다. 인력 육성 방안·반도체 기업 세제 지원 내용이 담긴 반도체특별법(K-칩스법)은 8월 발의 이후 제대로 된 논의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대기업 특혜', '지방소외법' 등의 이유로 논의가 어렵다는 입장을 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2019년 이후 공급망의 중요성을 체감할 수 있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도체 생태계 육성의 필요성을 느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반도체 경쟁력을 올리기 위한 꾸준하고 신속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미국, '반도체 업계 G·O·A·T(Greatest of All Time)'
미국 반도체 대표팀은 초호화 선수 멤버를 앞세운 '영원한 우승후보'입니다.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10대 반도체 업체 중 6군데가 미국 소재 회사일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고 있는데요. 차근차근 라인업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미국에는 연매출 790억달러(지난해 기준, 약 104조원) 규모를 자랑하는 '인텔'이라는 초거대 종합반도체(IDM) 회사가 있습니다. IDM은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회사입니다. 1968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인텔은 중앙처리장치(CPU) 분야에서 상당히 강한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CPU는 PC, 서버 등에서 '두뇌'를 담당하는 프로세서입니다. 특히 서버 CPU 시장에서 80% 이상 점유율을 확보했습니다. 비대면, 메타버스, 클라우드가 활성화되는 시대에서 서버용 CPU 리더십은 상당히 큰 존재감이죠. 예전부터 PCIe 등 각종 인터페이스, 미래 패키징 공정과 EUV 기술같은 최첨단 기술 생태계는 인텔이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미국 반도체 공급망 재건의 선봉장으로 서고 있는 업체도 인텔입니다. 지난해 'IDM 2.0'이라는 기조 아래 애리조나에 2개 팹을 설립하며 파운드리 사업까지 재개하겠다고 선언한 뒤, 올해에는 1월 해가 뜨자마자 오하이오주에 24조원을 들여 추가로 팹을 2개 더 건설하겠다고 했습니다. 겔싱어 CEO는 지난 5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주요 경영진을, 지난 9일에는 경계현·김우준 삼성전자 사장을 만나 올해만 두 차례 삼성전자와의 협력 방안을 모색했는데요. 과연 내년 반도체 업계 두 거물인 삼성전자와 인텔 간 어떤 반도체 협력 방안이 나올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반도체 설계 분야 스쿼드도 두텁습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세계 시스템 반도체 시장 점유율 70%는 미국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IT 기업 애플, GPU 설계로 유명한 엔비디아, 인텔의 라이벌 AMD,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분야 독보적 강자 퀄컴 등 기라성 같은 업체가 포진 중이죠.
메모리 분야에도 좋습니다. 세계 D램 3위(25% 내외) 마이크론 테크놀러지가 있는데요. 마이크론은 올해 세계 최초 232단 낸드 양산 등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바짝 추격하며 업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향후 뉴욕주에 1000억달러(132조원)를 투자하겟다는 과감한 설비 투자를 하며 미국 반도체 공급망 재건에 적극 참여 중입니다.
후방 생태계도 든든합니다. 소재, 부품, 장비 무엇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국가입니다. 장비의 경우 한국 대표팀에서 언급했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 램리서치, KLA는 미국 반도체는 물론 세계 장비 업계에서 3대장입니다. 지난해부터 올해 반도체 호황으로 이 업체들에 주문이 몰리면서 납품 기간(리드타임)이 3~4배 길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죠. 내년 반도체 시장 다운턴, 미-중 무역 분쟁 이슈가 이들의 리드타임에 어떤 영향을 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소재 분야에서는 듀폰, 인테그리스와 이들의 자회사 CMC 머티리얼즈(캐봇), 인프리아 등 저마다의 원천 기술로 반도체 후방 빌드업을 돕는 기업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더욱 괄목할 만한 것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아주 공격적인 반도체 공급망 지원 정책입니다. 미국은 1990년대만 해도 세계 반도체 생산의 37% 가량을 담당했는데요. 오늘날은 아시아 외주 생산량이 늘면서 12%에 불과합니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이 심화로 아시아 위주의 반도체 생산 인프라, 중국 대표팀의 기량 급성장 등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 대표팀 수장 바이든 대통령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8월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에 서명합니다. 이 법은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 확대를 위한 520억달러(68조원) 보조금을 지원하고, 각종 세제 지원과 인력 양성을 지원한다는 게 골자입니다.
'반도체는 인프라'를 외쳤던 바이든은 자국 반도체 성장을 위한 우방국과 협력에도 상당히 적극적입니다. 지난 3월 반도체 기술 선두 주자인 한국, 일본, 대만에 칩4 동맹을 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했죠. 또 삼성전자의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부터 TSMC 최첨단 공장까지 각 국가 대표 선수들을 현지로 다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지난 2일에는 SK실트론CSS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죠.
특히 최근 일어난 미국 반도체 이슈 중 가장 괄목할만 한 것이 지난 7일 바이든 대통령의 TSMC 공장 장비반입식 방문입니다. 이 현장에서 TSMC 수뇌부는 바이든 대통령 앞에서 기존 2020년 계획보다 투자 예산을 3배 이상 늘린 40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공장에서 3나노 제품을 생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현장에는 팀 쿡 애플 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리사수 AMD CEO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IT계 거물들이 총출동한 건데요. 팀쿡 CEO는 "TSMC 애리조나 공장 반도체를 사용하겠다"고 아예 보장을 하는 등 TSMC를 지원사격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과연 삼성전자 테일러 공장 착공식(또는 준공식)이 현지에서 열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미국 대표팀의 반도체 내재화와 반도체 공급망 전쟁, 향후 몇년 간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 '울트라 닛폰' 재건 꿈꾼다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왕국이었습니다. 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쓰 등이 세계 반도체 메모리 시장 80%를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죠. 그러나 미국 정부의 견제, 2010년대 한국 업체들의 매서운 추격으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칩 제조사를 보면 낸드플래시 세계 3위 기옥시아, 세계 5대 차량용 반도체 제조사 르네사스 외 첨단 선단 공정에서 치고 나가는 회사를 찾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반도체 업계에서 일본 대표팀의 존재감은 상당합니다. 소부장 기술을 앞세운 후방 빌드업과 끈끈한 조직력 때문입니다. 먼저 장비 분야에서 가장 먼저 소개할 선수는 도쿄일렉트론(TEL)입니다. EUV 공정에 쓰이는 트랙 장비 세계 독점 생산, 각종 식각·증착 핵심 장비 기술 확보로 세계 5대 장비 메이커로 명성을 날리고 있죠. 증착 분야에서 강한 면모를 띄는 고쿠사이, EUV 마스크 검사 장비(APMI) 강자 레이저텍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업계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생소한 현지 중소·중견 장비 부품 업체들을 주축으로 아주 정교한 공급망을 형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반도체 장비 공급 부족 현상이 한창일 때도 일본에서는 탄탄하고 촘촘한 공급망으로 리드타임 문제를 최소화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소재 쪽에서도 각 분야의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합니다. 웨이퍼에서는 세계 1위 신에츠화학(점유율 30% 내외)과 2위 섬코(25% 내외), 반도체 마스크 분야에서는 호야(EUV 마스크 독점 생산), 포토레지스트 분야에서는 JSR, 도쿄오카공업(TOK), 스미토모화학, 후지 등 이루 열거하기 힘든 잘하는 회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EUV 포토레지스트 분야에서는 일본이 95% 이상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2019년 우리에게 괜히 일본 수출 규제로 으름장을 놓은 게 아닙니다.
이 와중에 일본 정부의 반도체 산업 부흥을 위한 노력이 눈에 띕니다. 일본은 최근 2022년도 제2차 추경예산안에서 반도체 관련 예산으로 1조3000억엔(약 12조원)을 책정했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10월 일본 국회 연설에서 "10년간 10조엔(약 100조원) 증가가 필요하다고 하는 반도체 분야에 관민 투자를 모아나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일본 정부 움직임과 맞물려 일본 반도체 업계에서는 상당히 재밌는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올해 일본에서는 도요타·기옥시아·소니·NTT·소프트뱅크·NEC·덴소·미쓰비시UFJ 은행 등 주요 기업 8개가 힘을 합쳐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를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는 5년 뒤인 2027년 2나노 반도체 생산을 목표로 합니다. 일본 정부도 신설 법인에 700억엔(약 6700억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과연 유망주로 떠오른 라피더스는 삼성전자·인텔·TSMC와 기술 경쟁을 할 수 있을만큼 성장할까요? 5년 뒤 모습이 정말 궁금해집니다.
일본 정부 역시 대만 TSMC와 마이크론 등 세계적인 반도체 선수들의 생산·R&D 기지를 현지로 끌어들인 것이 눈에 띕니다. 현재 TSMC는 소니·덴소와 구마모토 현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인데요. 일본 정부는 여기에 4760억엔(약 4조5000억원)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마이크론은 최대 8000억엔(약 8조원)을 들여 일본 히로시마현에 D램 공장을 신축하기로 했죠. 여기에도 일본 정부가 최대 46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하는 등 '외국 손님 모시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TSMC는 일본 내 제 2 반도체 공장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네요. 소부장 강자 일본이 칩 제조에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 과연 우리나라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2편에는 중국·대만·유럽연합(EU) 대표팀의 전력을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반도체 월드컵은, 서울경제신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