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견제가 심화하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이 중국 내 장비 매각 계획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가뜩이나 업계 불황으로 비상경영에 돌입한 국내 기업들이 벌써부터 중국 공장 운영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6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국내 핵심 반도체 기업 A사는 최근 중국 내 반도체 유휴 장비 매각 과정에서 중국 협력 업체들 대신 국내 업체만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A사는 올 9월 반도체 팹(fab·생산 공장) 장비 37대와 후공정 장비 15대를 협력 업체 대상으로 매각한다는 공고를 냈다. 매각 장비 중에는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 네덜란드 ASML의 장비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는 10월까지 참가 신청 접수와 장비 검수를 진행한 뒤 지난달 입찰을 시행하고 현재 추후 절차를 밟고 있다. 공고 직후인 10월 7일 미국 상무부는 중국 기업에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하도록 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제재안 발표 이후 국내 업체가 중국 내 장비 처분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내 기업은 1년간 적용이 유예된 데다 이번 매각 장비들이 구형 공정에 사용되는 장비라는 점에서 이번 매각은 미국 제재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A사는 혹시 모를 분쟁 가능성을 고려해 중국 내 협력 업체 대신 장비 반출·운송 비용 등을 매입 업체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국내 업체만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가뜩이나 업계 불황으로 긴축 경영에 나선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고가의 운송 비용까지 지불하면서 장비를 구매하기가 부담스럽다는 반응이다.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중국 간 갈등의 유탄을 맞기 시작했다며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장비 매각 등으로 재무 건전성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상황에서 양국의 반도체 갈등에 제대로 된 경영 활동을 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조중휘 인천대 임베디드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유휴 장비를 선제적으로 매각해야 할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기업의 부담이 나타날 수 있다”며 “경영 활동에 대한 제재가 겹치면서 상황마다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반도체, 특히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주력으로 삼는 메모리반도체의 불황이 깊어지면서 각 기업들은 불필요한 장비를 매각하고 투자를 줄이는 등 위기 대응책 실행에 나선 상황이다.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쑤저우에 후공정 공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는 비상경영 체제 돌입을 선언하고 각종 비용 절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 우시(D램)와 충칭(후공정)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더욱 긴박하다. 회사는 지난 3분기 콘퍼런스콜에서 미국의 수출 제한 조치 대응 전략으로 “팹 매각, 장비 매각 혹은 장비를 한국으로 가지고 오는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4분기 영업손실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SK하이닉스는 비용 최소화에 주력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장비를 헐값에 넘길 여력이 없고 마찬가지로 업계 불황의 한파를 맞고 있는 국내 업체들은 고가의 운송 비용을 들이면서 장비 구입에 투자할 상황이 아니다. 장비를 팔지 못하게 되면 현금 확보 측면의 어려움뿐 아니라 현지에서 장비를 보관하는 데 비용을 들여야 하는 등 다방면의 어려움이 나타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장비 수입 제한 리스크 때문에 구형 중고 장비라도 사들이려는 수요가 있다”며 “구공정 장비는 첨단 기술 추격에 대한 우려가 적은 만큼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처분할 수 있을 때 처분하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벌써부터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1년 뒤다. 미국의 중국 견제가 하루가 다르게 심화하는 상황에서 유예기간이 지난 뒤 국내 기업들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 활동이 어떤 위기를 겪을지 예상하기조차 어려워서다.
반도체 장비 핵심 수출 국가인 일본과 네덜란드는 최근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 조치에 참여하기로 했다. 미국을 포함해 이들 세 나라는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은 유예기간 이후라도 미국의 제재가 직접적으로 한국 기업을 겨냥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필요한 장비를 제때 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각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깊어지는 가운데 핵심 제조 기지에서 차차기 공정을 위한 첨단 장비를 들여올 수 없게 되면 현재 국내 업체가 쥔 ‘메모리 패권’도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장비 제재에 위협을 느낀 중국이 자국 내 반도체 장비를 해외로 유출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 경우 국내 기업들은 자칫 새 장비를 구입하지도, 기존 장비를 처분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정부와 기업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 기업 입장에서는 중국이 최대 매출처인 데다 중국 내 생산 기지에 이미 천문학적인 투자를 집행한 만큼 당장 철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인 미국을 외면할 수도 없다. 미국·중국 간 갈등 양상으로 불거진 문제인 만큼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도 제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