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현지 시간) 오전, 우크라이나 키이우 일대에 공습경보가 울리자 주민 할리나 흘라드카는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갔다. 러시아의 기반시설 공습으로 전기가 끊기기 전에 가족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올 2월 시작돼 결국 해를 넘기게 된 전쟁의 포화 속에 단전·단수와 인명 피해는 이미 우크라이나인들의 일상이 됐다. 흘라드카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러시아의 미사일 단 한 발도 가족들과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맞으려는 우리 계획을 망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러시아가 연말연시를 앞두고 개시한 대규모 기반시설 공격으로 우크라이나에 또다시 암흑이 찾아왔다. 주민들은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의연하게 일상을 지켜나가고 있지만 새해를 앞두고 재개된 대규모 공습으로 긴장감은 높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미사일이 러시아 우방인 벨라루스 영공으로 넘어가면서 벨라루스 참전의 빌미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장갑차 지원을 검토하면서 새해에 전쟁이 격화할 가능성도 커지는 모양새다. 이에 질세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화상 정상회담을 열어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고 시 주석을 러시아로 초청했다.
CNN에 따르면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29일 오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기반시설을 향해 69발의 미사일을 발사했으며 이 중 54발을 우크라이나군이 요격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관계자들은 러시아가 이보다 많은 120발의 미사일을 쐈다고 주장했다. 발표 수치는 엇갈리지만 어쨌든 이날 공습은 러시아가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에 가한 공습 중 가장 큰 축에 속한다. 10곳 이상의 중요 기반시설과 18채 이상의 주택 건물이 파괴됐으며 최소 3명이 사망하고 7명이 다쳤다. 러시아는 공격 하루 만인 30일 새벽에도 자폭용 드론 공습을 이어갔으나 우크라이나군이 16대 전부를 격추했다.
전력 공급이 끊기면서 우크라이나는 또다시 암흑에 휩싸였다. 헤르만 할루셴코 우크라이나 에너지장관에 따르면 키이우·오데사·르비우 등 주요 도시가 특히 큰 타격을 받았다. 르비우는 도시의 90%에 전력 공급이 끊겼고 키이우·오데사는 전력망의 대형 손상을 막기 위해 미리 전력을 끊는 ‘비상단전’으로 대응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보조배터리를 준비하고 물을 미리 받아두며 단전·단수에 대비하고 있지만 정전 피해 인구가 27일 하루에만 약 9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어려움은 계속되고 있다.
전황이 새해 이후 더욱 격화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이날 오전 벨라루스는 자국 영공으로 넘어온 우크라이나 방공 미사일 S-300을 격추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자국 미사일임을 시인하면서 이번 사건이 러시아의 공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벨라루스에 계속 참전을 압박하는 만큼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벨라루스가 전쟁에 가세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아울러 겨울이 끝나면 대규모 지상전이 재개될 것이라는 관측 속에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브래들리장갑차 지원을 검토하고 나섰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속적인 지원에 ‘맞불’을 놓듯 시 주석을 모스크바로 초청했다. 푸틴 대통령은 30일 방송된 양국 간 화상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을 ‘친애하는 친구’라고 부르며 “우리는 당신이 내년 봄 모스크바를 국빈 방문하기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을 염두에 둔 듯 “러시아와 중국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시 주석은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취지로 응답했다. 이날 통화에 대해 블룸버그통신은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의존도가 깊어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