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자원무기화 및 우방국 간의 공급망 구축을 골자로 하는 ‘프렌드쇼어링’ 가속화와 세계무역기구(WTO) 체계가 갈수록 와해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분기 기준 무역의존도가 글로벌 최고 수준인 79.7%에 달하기 때문에, 무역질서가 와해되면 상당한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 정부 또한 이 같은 글로벌 통상질서 변화에 대응해 꾸준히 신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계속되는 인력이탈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갑작스레 출몰하는 ‘블랙스완(예상하지 못했던 이례적 사건)’ 등으로 대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지난해 불거진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관련 이슈에 정부 통상정책 역량 대부분이 투입되며, 미래 통상정책 로드맵의 완성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산업·에너지에 이은 3순위.. 통상, 인력유출 지속
16일 통상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 내 통상핵심 인력이 이탈이 가속화 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통상교섭본부 산하 에이스로 분류됐던 실장급(고공단 가급) 인사가 S그룹으로 이동했으며, 원어민 수준의 영어실력 등으로 산업부내 통상분야에서 첫손에 꼽혔던 핵심인력(과장급) 또한 또 다른 S그룹으로 이직했다. 일본과의 수산물 분쟁에서 완승을 이끌어내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렸던 국제법 최고 전문가인 모 과장 또한 지난해 6월 산업부를 떠났으며, 통상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과장급 인사 두명은 순환보직 정책에 따라 지난해 비통상부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에 산업부 내에서 차기 통상교섭본부장 1순위로 거론됐던 고위급 인사 또한 최근 퇴직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 핵심인력유출이 계속되는 모습이다.
산업부 내 분위기를 종합해 보면 통상본부는 여타 실·국 대비 다소 선호도가 떨어진다. 이 같은 낮은 선호도는 산업부 내 통상본부 역사와 관련이 깊다. 산업부는 1993년 상공부와 동력자원부(동자부)가 통합해 ‘상공자원부’가 됐으며 이듬해 ‘통상산업부’로 다시 간판을 바꿨다. 이후 1998년 통상 기능을 외교부에 빼았기며 ‘산업자원부’가 됐다. 2008년에는 부처명을 ‘지식경제부’로 바꿨다가 2013년 통상 기능을 외교부에서 되찾아오며 지금의 ‘산업통상자원부’가 됐다.
산업부는 지금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통상산업부 시절부터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상공부 출신이 훨씬 우대를 받았다. 최근 몇년 사이에는 에너지 분야의 중요성이 커지며, 산업부내 에이스급 인사들이 에너지 관련 커리어 확보를 위해 인사희망시 에너지쪽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실제 이전 정부의 마지막 산업부 차관 2명(박진규·박기영)은 모두 동자부 출신이었으며, 기재부 출신이 사실상 독점하던 청와대 경제수석에 산업부 출신으로 이름을 올려 주목을 받았던 박원주 전 수석 또한 동자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반면 산업부내 에이스급 인력들의 통상 관련 커리어는 살펴보면 길어봐야 1~2년 정도다. 산업부는 관료들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최소 2~3년간 한 부서에서 근무토록하는 인사혁신안을 시행할 방침이라 오히려 통상에 대한 비선호도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통상 쪽 선호도가 떨어지는 배경에는 5년마다 반복되는 ‘분가(分家)’ 관련 논쟁도 상당부분 작용한다. 산업부는 2013년 통상기능을 다시 되찾아왔지만, 매 정권 출범때마다 외교부 측과 ‘솔로몬의 지혜’ 에피소드에 나오는 친모 찾기가 연상될만큼 ‘통상은 우리 것’이라는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이는 산업부 인력구성에서도 드러난다.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출범 당시 외교부에서 넘어온 인사들은 극히 일부였으며, 현재 이들 중 국장급(고공단 나급) 이상의 보직을 맡고 있는 이들은 3명에 불과하다. 이전 정부 시절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산업부 내 원하는 인재를 확보하지 못해, 당시 인사를 담당하던 산업부 차관과 얼굴을 붉혔다는 일화는 산업부 내에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대다수 전문가는 매 정권 출범때마다 반복되는 ‘통상기능의 외교부 이전’ 논쟁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다고 조언한다. 이미 팹4와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의 이슈로 통상과 산업부문간의 연결성이 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실제 대중국 포위망으로도 불리는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IPEF)의 4대 핵심분야는 △무역 △공급망 △청정에너지·탈탄소·인프라 △조세·반부패 등 4가지로 기획재정부가 담당하는 조세분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산업부 소관이다.
무엇보다 IPEF는 우리나라의 산업통상자원부와 역할이 같은 미국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가 주도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가 아닌 상무부가 전면에 나선 배경에는, 미국이 군사력이 아닌 공급망 등 경제부문을 중심으로 글로벌 판도를 재편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에따라 쿼드(QUAD) 같은 명백히 군사·외교적 성격을 띄고 있는 사례를 제외하면 향후 미국 등 주요국이 내놓을 각종 협의체 또한 산업이나 공급망 관련 모임이 대부분일 전망이다.
美 IRA에 발목잡힌 통상당국
이 같은 산업부 내의 인력이탈 분위기에 더해 최근 통상환경 급변까지 더해지며 통상교섭본부의 어려움은 가중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산업부가 글로벌 질서 변화에 제대로 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표적 이슈가 IRA다. 산업부는 지난해 8월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 주재로 국내 전기차 및 배터리 업체와 간담회를 갖고 “IRA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WTO 협정 등 통상규범 위배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IRA에 대응해 사실상 FTA와 WTO를 미국 압박용 카드로 꺼내든 셈이다.
반면 미국과의 FTA는 무역수지만 보면 우리나라에 상당히 유리한 협정이다. 한미 FTA 체결 당시인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의 대미 무역흑자 누적 규모만 2153억3000만 달러에 달한다. 이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한미 FTA에 대해 ‘끔찍하다’며 결국 2018년 미국에 다소 유리한 방향으로 이를 개정하기도 했다. 당시 통상업계에서는 미국 정부가 아닌 미국 의회에서 제정한 IRA 법안을 이유로, 우리측이 FTA 위반 이슈를 제기할 경우 득보다 실이 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 이유다.
WTO 이슈는 더욱 심각하다. WTO는 미국이 ‘중국에 유리한 판결이 남발된다’는 이유로 2019년 WTO의 대법원 역할을 하는 상소기구 상소위원 임명을 보이콧 하며 사실상 무력화 된 상황이다. 우리 정부는 2021년 중국의 갑작스런 요소 수출 중단에 따른 ‘요소수 부족’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는데다 실효성 등을 이유로 WTO 측에 관련 이슈를 문제제기 하지 않은 바 있다.
안 본부장의 발언이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이지만, 통상장관으로서의 발언으로서는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이유다. 이같은 문제제기 때문인지 정부 당국은 불과 2주정도 후에 “IRA와 관련해 WTO 등 국제기구 제소는 최후의 수단”이라며 한발 물러선 바 있다.
IRA는 통상정책의 관련 로드맵도 흐트려놓았다. 산업부는 IRA 관련 대응 때문에 지난해 9월초 공개하려면 ‘새정부 통상정책방향’ 발표 일정을 무기한 연기했다. 산업부의 통상정책 방향은 지난달 산업부 신년업무보고에서 △급변하는 통상환경에 대응 △신시장 개척을 위한 산업통상협력 강화 △IPEF·WTO 등 신통상규범 논의 등의 내용으로 발표됐지만, 산업과 에너지 등 여타분야에 이어 가장 후순위로 발표돼 주목도가 떨어졌다. 산업부는 이달 11일에는 ‘통상교섭민간자문위’를 통해 20개국가와의 ‘무역투자프레임워크(TIPF)’ 체결 등을 골자로 한 통상정책방향의 세부안을 공개하기도 했다. 특히 안덕근 본부장이 금주들어 내·외신 기자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 홍보에 나서며 새정부 통상 어젠다 설정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다만 IRA 관련 이슈 대응 문제로 산업부 내 팀장급 인사가 ‘대기발령’ 조치를 받는 등 IRA 관련 여진이 산업부 내에서 계속되고 있다.
한 통상 관계자는 “중국 견제에 집중하고 있는 미국이 통상과 관련한 규범을 새롭게 구상하는 상황에서 우리 통상당국 또한 미국현지 상주 인력을 늘리고 현지 ‘아웃리치’ 활동을 훨씬 강화하는 방식 등으로 보다 적극적 통상활동을 펼칠 필요가 있어 보인다”며 “특히 FTA와 같은 양자간의 통상규범보다 인권, 환경, 공급망 등 다양한 이슈를 중심으로 통상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에 인력을 집중투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 미국은 WTO 등 중국이 가입한 글로벌 무역질서는 관련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를 와해하려 애쓰지만, 미국이 주도한 통상질서는 이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워싱턴 정가 등에 따르면 미국의 이같은 ‘정밀타격’ 방식의 통상 전략은 불과 2년여 사이에 수립된 것으로 전해졌다.
기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개정해 2020년 출범한 USMCA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USMCA 조약에 근거한 자동차 원산지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얼마전 공개된 판결문에 따르면 미국은 USMCA의 판결을 부정하지 않고 캐나다와 멕시코 등과 협업해 해결방안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WTO 판결 때 마다 효력을 부정하던 것과는 온도차가 상당하다. 미국은 유럽과 체결한 무역기술협의회(TTC)는 물론 일본, 한국, 대만 등 4자간 반도체 협력체인 ‘칩4(팹4)’ 등 자신들이 주도한 규약에서는 USMCA와 비슷한 입장을 견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해 한 통상 전문가는 “미국에 대해 ‘자신들이 만들었던 자유무역체제를, 자국내 일자리 문제 등으로 자신들이 와해시키고 있다’는 일각의 비판은 우리의 아픈 속을 달래줄 수 있지만, 우리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는 데는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WTO 체제 와해와 미국의 경제블록 강화를 ‘뉴노멀’로 받아들이고 이에 기반해 통상 전략의 패러다임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