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의 은퇴와 함께 노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역대 정부에서 정년 연장은 판도라의 상자로 간주돼왔다. 아직 청년 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남아 있는 만큼 정년 연장은 젊은 세대의 밥그릇 뺏기라는 따가운 시선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앞서 문재인 정부도 정년 연장 카드를 만지작거렸을 뿐 흐지부지된 바 있다. 하지만 생산가능인구가 2019년 3762만 8000명으로 고점을 찍고 가파르게 감소 중이라 더는 정년 연장 논의를 미룰 수 없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8일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올해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3637만 2000명으로 역대 최다였던 2019년 3762만 8000명에서 4년 만에 125만 명이나 줄었다.
문제는 앞으로 감소 속도가 더 가팔라진다는 점이다. 2025년 3561만 명, 2030년 3381만 명을 지나 2040년에는 2852만 명으로 3000만 명 선조차 무너진다. 정년을 연장해 더 많은 사람이 생산 활동에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이유다.
우리보다 더 일찍 저출산 고령화를 맞은 다른 선진국에서는 이미 정년을 올리거나 아예 폐지하고 있다. 1967년 정년을 65세로 정한 미국은 1978년 70세로 올렸다가 1986년 정년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앴다. 정년을 정하는 것 자체가 나이에 따른 차별이라는 이유에서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2011년 연령 차별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정년을 없앴다. 일본 역시 법적 정년은 65세지만 근로자가 원할 경우 70세까지 일할 수 있다. 독일은 2029년까지 정년이 65세에서 67세로 늦춰진다.
우리나라는 2013년 60세 정년이 도입됐고 추가 연장 혹은 폐지 논의가 한창이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65세로 늦춰지며 ‘소득 골짜기’가 생기는 점도 정년 연장에 힘을 싣는다. 이와 관련해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근 고용정책심의회를 열고 60세 이상 근로자의 계속고용을 위한 사회적 논의에 착수하기로 했다. 일본이 단계적으로 도입한 고용 확보 조치와 비슷한 방식이 거론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청년층 반발이 변수다. 정년 연장이 가뜩이나 좋지 않은 청년 실업 문제를 더욱 키울 수 있는 탓이다. 실제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 교수는 논문을 통해 “정년 연장에 따른 상용 근로자의 증가가 매년 1만~1만 2000개의 청년 일자리를 잠식했다”는 결론을 내기도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요즘 노인의 무임승차 논란이 뜨거운데 자칫 잘못하면 ‘노인들이 지하철 요금을 좀 더 낸다’는 명분으로 정년 연장을 받아내 청년들 일자리를 독식하려 한다’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정년 연장 과정에서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오랜 기간 논의를 진행해 청년층이 하는 일과 노년층이 하는 일이 다를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뒤 서서히 정년을 연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도 “정년을 큰 칼로 무 자르듯이 ‘65세’ ‘67세’ ‘70세’처럼 일괄적으로 정해버리면 오히려 사회 곳곳에서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회사 상황, 업무 특성 등을 잘 반영해 섬세히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1995년생(약 71만 명)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2002년생(약 49만 명)이 새로 일자리를 구하는 4~5년 뒤부터는 청년 실업 문제도 지금보다 완화하는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의를 진행해야 갈등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은 호봉제 폐지다. 단순히 오래 근무했다는 이유로 높은 연봉을 받는 현재의 구조에서는 기업들이 정년 연장에 대한 유인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기업 입장에서는 장기근속 고연봉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조기 퇴직을 종용하게 된다. 특히 직무급제 도입이 지지부진한 공공 부문에서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 교수는 “호봉 제도가 가장 강력하게 자리 잡은 공무원·공공기관을 놓아두고 민간에 직무급제 도입을 강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일단 올해는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호봉제 폐지에 나서되 내년부터는 공무원의 호봉제 폐지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꺼번에 공무원 조직 전체를 바꾸는 건 어려운 만큼 부처·지방자치단체별로 호봉제를 폐지하는 곳에 기획재정부가 인건비를 더 올려주는 식으로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