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직접 앞에서 맞닥뜨리면서 순수예술의 힘을 느끼고 있습니다. 음악에는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 적에 대한 승리로 이끄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음악을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알리고 세계인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면 음악가로서 저의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리 얀코는 국제 클래식 무대에서 우크라이나 출신 지휘자 중 대표 격으로 꼽히는 음악가다. 그는 2004년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명예 예술인’으로 선정됐고 2009년에는 대통령 공로훈장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머무는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는 지난해부터 이어진 전쟁의 격전지 중 하나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건물 수백 채는 물론 학교·병원·아동기관들도 파괴됐다. 그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하르키우 필하모닉의 공연장도 외관이 크게 무너졌다.
무력 앞에 예술은 힘이 없는 것 같지만, 그는 여전히 음악의 힘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24일 경기도 부천시민회관에서 자신의 지휘로 열리는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서울경제와 서면으로 만난 얀코는 “음악가들은 조국의 명예와 영광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전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자신과 하르키우 필하모닉이 “소명의식을 갖고 세계를 돌며 연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하르키우에서 공연이 불가능해서 다른 도시 혹은 해외에서 연주하는데, 때로는 버스로 편도 40시간을 이동하는 수고도 감수해야 한다. 오케스트라 단원과 합창단, 기술자 등 필하모닉의 직원들 중 전선에서 직접 싸우는 이들도 있다. 이 모두가 “각자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투쟁하면서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얀코는 300회를 맞는 부천 필의 이번 정기연주회에서 ‘영웅적인 베토벤’이라는 기본 테마 아래 모든 프로그램을 베토벤의 곡들로 꾸민다. 교향곡 제3번 ‘영웅’과 ‘레오노레 서곡 제3번’을 연주하며, 피아노협주곡 4번도 지난해 독일 ARD 콩쿠르 준우승자인 피아니스트 김준형의 협연으로 선보인다. 그는 “제게 베토벤은 정신적 지주, 불굴, 악을 넘어선 선의 승리에 대한 믿음, 과거의 어둠을 미래의 빛으로 바꾸는 길”이라며 “그의 곡 중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을 골랐다”고 말했다. 특히 ‘영웅’ 교향곡의 선곡에 대해서는 “불굴의 투쟁 끝에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을 이겨내고 자유와 독립을 얻으리라는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과의 인연에 대해 “스승이자 저 이전의 하르키우 필하모닉 음악감독인 바르탕 요르다니아가 한국에서 수 년 동안 일했고, 저 역시 한국인들과 많이 협업했다”고 밝혔다. 그는 연주회를 찾을 관객들에게 “한국은 훌륭한 문화와 놀라운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나라이고, 이 아름다움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라며 “베토벤의 독창적인 음악을 즐겨 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