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에 베트남·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가 새로운 반도체 메카로 급부상하고 있다. 미중 갈등에 따른 유탄을 피하기 위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탈(脫)중국을 고려하는 상황에서 동남아 국가들은 파격적인 혜택을 내세워 이들 기업을 빨아들이고 있다.
최근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전 세계 반도체 생산 장비 공급의 35%를 담당하는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램리서치·KLA 등은 지난해 말부터 중국 사업부 내에서 중국 외 국적 직원을 싱가포르·말레이시아로 이동시키고 동남아에서의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AMAT는 지난해 12월 ‘싱가포르2030’을 발표하고 싱가포르에서의 제품 개발과 제조를 늘리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미국의 인텔도 베트남 투자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인텔이 베트남에 최소 10억 달러 이상의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텔은 2010년 자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패키징·테스트 공장을 베트남 남부에 완공했고 지금까지 베트남에 대한 누적 투자 규모만 15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텔은 또 2021년 말 말레이시아에 70억 달러 투입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마이크론은 싱가포르에서 낸드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글로벌파운드리도 올해 싱가포르에서 신규 공장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외에 유나이티드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UMC) 등도 이미 동남아에 있는 생산 설비를 추가로 확대할 계획이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동남아로 몰려가는 것은 미중 지정학적 갈등에 따른 불똥을 피하기 위해서다. 미국이 지난해 10월부터 첨단 반도체에 대한 대중국 수출통제를 시행하면서 기업들은 중국에서의 반도체 관련 제품 생산을 과거처럼 원활히 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동남아 국가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파격적인 세제 혜택 등을 내걸고 있는 것도 배경이다. 베트남은 하이테크 산업에 속한 기업의 법인세를 4년간 면제해주고 이후 9년까지는 50%를 감면해주고 있다. 싱가포르는 기본 법인세율을 17%로 우리(24%)보다 낮게 책정했고 기업 투자 활동에 각종 보조금도 주고 있다.
아울러 이들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이미 반도체 관련 설비가 존재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1960년대 미국 반도체 산업이 생산 비용을 낮추기 위해 처음으로 공장을 아시아로 옮기기 시작했을 때 선택된 곳이 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이었다. 이들 나라는 반도체 제조·패키징 및 테스트 클러스터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는 전 세계 반도체 후공정 분야에서 13%의 점유율을 차지할 만큼 탄탄한 반도체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