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마지막 핵군축조약’으로 불리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공식화하면서 세계에 핵무기 경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확산일로였던 핵보유국들의 핵무기 개발 흐름이 이번 선언을 계기로 가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세계 3위 핵탄두 보유국인 중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뉴스타트가 재개되더라도 핵군축 시대의 종언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이 적지 않다.
로이터통신은 22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이 기자들과 전화회의에서 뉴스타트 참여 중단 방침에 대해 “안보 보장을 위해 군비 통제를 비롯해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며 “서방이 우리의 우려를 고려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선언하고 복귀 조건으로 미국·영국·프랑스의 핵무기 통제를 내건 것을 재확인한 셈이다. 뉴스타트는 미국과 러시아가 2010년 체결했으며 양국의 실전 배치 전략 핵탄두와 운반체의 숫자를 각각 1550기, 700기로 제한하고 준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상호 사찰한다는 것이 골자다. 탈냉전기인 1991년 체결된 전략무기감축협정(스타트)의 후속 성격으로 도입됐으며 2021년에 종료 시한을 2026년까지로 5년 연장했다.
푸틴 대통령의 발언은 대(對)서방 압박의 성격이 강하다. 러시아가 복귀 여지를 남겨둔 데다 양국 간 사찰이 이미 수년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조약 참여 중단 자체보다 그로 인한 ‘파급 효과’다. 뉴스타트는 미·러 양대 핵 강국이 핵무기 배치를 제한하고 상호 핵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핵군축 협정이라는 의미가 작지 않다. 제임스 캐머런 오슬로대 ‘오슬로핵프로젝트’ 연구원은 “(뉴스타트가 무력해지면) 양측 모두 최악의 시나리오에 기반해 더 정교한 핵무기 체계와 계획을 도입하며 큰 불안이 생겨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러시아와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는 지난해 1월 기준 각각 5977기, 5428기로 전 세계 핵탄두의 약 89.7%를 차지한다.
특히 러시아의 선언이 각국의 핵무기 개발을 더욱 부채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SIPRI는 지난해 6월 모든 핵보유국들이 최근 핵무기 생산 시설을 현대화하거나 새로운 무기 개발에 착수했다며 “35년간 감소했던 세계 핵무기가 향후 10년간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윌리엄 앨버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전략·기술·군축국장은 “뉴스타트의 붕괴가 (핵보유국인) 인도·파키스탄·중국에 어떤 메시지를 줄지 생각해보라”며 “이는 더 많은 국가가 더 많은 핵탄두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해 세계 안보에 냉전보다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핵무기) 3대 강국 중 하나인 중국을 제외한 군비통제조약은 무용지물”이라며 중국을 향후 핵군비 경쟁의 주요 변수로 지목했다. 중국은 현재 300~350기의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핵군축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미 국방부는 중국이 앞으로 12년 안에 실전 배치 전략핵을 미국(1744기), 러시아(1588기)와 비슷한 수준인 1500기로 늘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대만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핵 억지력을 키우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한편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에 맞서 결속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스푸트니크통신 등 외신은 푸틴 대통령이 이날 오후 러시아를 방문 중인 ‘중국 외교 사령탑’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을 만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러시아 방문을 기다린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 그는 “(중·러 협력이) 국제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