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이익 공유, 영업 기밀 제공 등의 독소 조항이 줄줄이 달린 미국 반도체 보조금 세부 신청 기준을 두고 우리 정부의 조심스러운 스탠스 변화가 감지된다. 여당도 ‘납득할 수 없는 반시장적 행위’로 규정한 뒤 의원 외교를 통한 해결에 나서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기업들은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상향(대기업 8→15%, 중소기업 16→25%) 등을 담은 법 개정안이 조속히 통과하도록 당정이 힘을 합쳐 달라고 호소했다. 당정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통해 반도체를 포함한 주력 산업에 5년간 30조 원 규모의 정책금융을 공급하는 등 패키지 지원책을 내놨다. 하지만 비판 여론에 부랴부랴 대책을 급조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3일 여당과 정부, 기업이 수출 위기 극복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머리를 맞댄 것은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25년여 만에 처음으로 ‘12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라는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수출 정책을 관장하는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세계 경기 둔화와 반도체 가격 하락 등이 지속되면서 지난달에도 수출이 감소하는 등 수출 여건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위기 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 산업부와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달 무역적자는 53억 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무역적자가 이어지고 있는데 무역적자가 12개월 이상 지속된 것은 1995년 1월~1997년 5월 이후 25년 9개월 만이다. 반도체와 대중(對中) 수출이 좀처럼 부진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수출액은 501억 달러로 1년 전에 비해 7.5% 줄어 5개월 연속 감소했다. 특히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던 반도체는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59억 6000만 달러로 1년 전과 비교해 42.5%(44억 달러)나 곤두박질쳤다.
가뜩이나 불안한 수출 여건 속에 반도체 패권을 되찾아오려는 미국의 행보는 대중 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기회인 동시에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미국 상무부가 52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보조금 지원에 관한 지급 기준을 공고하면서 불안감은 증폭되고 있다. 기존에 알려졌던 가드레일(안전장치) 외에도 최대 75% 한도의 초과이익 공유, 주요 생산 제품과 생산량, 상위 10대 고객, 생산 장비 및 원료명 등의 영업 기밀 제공 등 부담스러운 내용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정부 반응도 이전보다는 한발 더 나갔다. 당초 주무 부처인 산업부는 미국의 보조금 지급 조건 등에 대해 “예단하지 않겠다”며 신중론을 폈다. 협상 상대방인 미국을 자극해 봐야 현실적으로 득 볼 게 없다는 판단으로 로키를 유지했다. 하지만 국내 기업이 미국 조치에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여론도 들끓자 동맹에 대해 홀대하고 있는 미국에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의 CNN비즈니스 인터뷰가 그런 예다. 한 총리는 ‘이대로면 우리 기업의 불이익이 예상된다’면서 ‘기업들이 미국 투자를 실제 할 지 잘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로 답했다. 미국 정부에 서운함과 동시에 이런 식이면 한국 기업도 투자를 재고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움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날 민당정협의회에서 보다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다. 성일종 정책위의장은 “한국 기업의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을 통제하고 (한국) 기업의 (초과)이익을 미국 정부와 함께 공유하자는 발상은 상당히 난해하고도 굉장히 중차대한 문제”라며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미국이 시장 질서를 침해할 수 있는 조치들에 대해 우리 국회는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민간 기업을 대표해 협의회에 참석한 한 반도체 기업 임원은 “(아직 미국 반도체지원법이) 구체적으로 안 나왔다”며 “우리가 그쪽(미국)에 (공장을) 짓는다고 했는데 아직 주정부와 협상이 진행 중이고 조만간 나올 가드레일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정은 우리 기업을 위한 외교적 해법을 강구하는 한편 국내 반도체 기업에 대한 지원책을 내놨다. 우선 한국판 칩스법(반도체특별법)으로 불리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협조를 구해 최대한 이른 시일 내 통과시켜 우리 기업이 반도체 투자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게 돕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아울러 반도체 후속 공정 분야가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만큼 연내 5300억 원 규모의 첨단 패키지 기술 개발 예비타당성 조사를 추진하기로 했다. 산업은행은 시스템반도체와 소부장·메모리반도체 산업 등에 향후 5년 동안 30조 원 규모의 금융 지원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