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까지 글로벌 반도체 패권을 차지했던 일본은 미국과의 반도체 협정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칩 설계와 파운드리는 물론 메모리반도체에서도 존재감은 없다. 기술 헤게모니를 빼앗긴 결과다.
미국이 40년 만에 다시 칼을 뺐다. 중국을 겨냥했지만 이면에는 반도체·배터리·전기자동차를 축으로 한 기술 강국 미국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은 반도체와 배터리·전기차 생산 공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5~10년 뒤 설계부터 생산·제조의 전 분야를 장악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전문가는 “기술 패권을 잃은 1980년대 일본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면서 “국익과 동맹의 축은 유지하되 민관이 치밀한 전략을 짜야 테크 빅뱅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등지에 경쟁적으로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과 관련해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미국 등지로의 쏠림은 과할 정도다. 8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등 K배터리 3사가 북미 지역에서 가동하거나 건설 중인 전기차용 배터리 합작 공장은 13개(단독 공장 포함)다. 2026년 K배터리 3사는 미국에서 연간 443.5GWh(기가와트시)의 배터리를 생산한다. 중국·일본 배터리사의 합작 공장까지 더하면 미국 생산량은 567.5GWh(전기차 1135만 대)로 국내 생산량(32GWh)의 18배다. 문제는 이 같은 쏠림이 미국과 맺은 배터리 동맹의 결과지만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처럼 언제든지 ‘자국우선주의’의 발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도 “반도체지원법을 보면서 우려되는 지점”이라고 토로했다.
이익 앞에 동맹이 깨질 조짐도 보인다. 포드와 CATL의 미국 공장 설립이 단적인 예다. 업계 관계자는 “솔직히 미국의 K배터리 견제라는 시각이 많다”면서 “동맹의 견제와 중국의 부상까지 염두에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말 기준 중국 배터리사의 글로벌 시장(중국 제외) 점유율은 26.5%로 2년 전 대비 14.2%포인트 올랐다. 반면 K배터리사의 합산 점유율은 53.4%로 0.9%포인트 늘어났다. 성장률로 보면 중국 배터리사들이 115.4%나 높아지는 동안 K배터리는 1.7%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