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여명] 과학·기술 멀리한 국가, '滅'했다

■이철균 산업부장

토레도 탈환, 중세유럽에 신대륙 이상 충격

逆수입한 그리스 과학·수학 토대, 패권 쥐어

美 IRA·칩스액트에 EU도 법으로 정면대결

전면전화 테크 패권전쟁, 방관 땐 미래 없어

이철균 산업부장이철균 산업부장




1085년 스페인왕국의 전신 중 하나인 레온·카스티야왕국의 알폰소 6세는 톨레도를 탈환한다. 역사학자들은 톨레도 탈환을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왜 그럴까.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톨레도는 삼면이 강이다. 지명도 ‘요새’를 뜻하는 라틴어 ‘Toletum’에서 유래했다. 요충지답게 수백 년간 수도 역할도 했는데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번갈아 지배했다. 이슬람은 711년 이후 약 4세기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에 이슬람은 종교적 이유로 유럽이 거부했던 그리스의 철학부터 의학·천문학·수학·과학 등의 막대한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한다. 플라톤부터 아리스토텔레스·피타고라스·유클리드 등 방대한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이슬람이 물려받은 것이다.



이슬람은 이를 무기로 과학·기술·의학 등의 분야에서 엄청난 문명 발전을 이뤄냈다. 톨레도를 탈환한 알폰소 6세가 당시 유럽보다 몇 단계 앞선,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역시 패권을 쥐어본 경험은 달랐다. 알폰소 6세 이후부터 아랍어로 돼 있는 수많은 그리스의 책들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잊혔던 그리스의 유산들은 유럽으로 역수입됐다. 그리스 문화와 과학의 재발견은 르네상스를 촉발시켰고 유럽은 세계의 주도권을 다시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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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과학·기술은 늘 패권을 좌우했다. 1337년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을 벌인다. 프랑스군은 영국이 자랑하는 장궁부대를 당해내지 못했다. 괴멸 수준까지 몰렸다. 1444년 2년에 걸친 휴전 기간에 프랑스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전세를 바꿀 신무기 개발에도 집중했다. 혁신의 산물, 대포의 등장이다. 1450년 노르망디 지역에서 두 군대는 맞붙었다. 영국은 역시나 장궁부대를 앞세웠다. 기술 앞에 한계는 뚜렷했다. 영국의 정예 장궁병은 화살 한 발 쏘지 못했다고 한다. 우습게 봤던 프랑스 대포에 병력 80% 이상이 전사했다. 백년전쟁의 승패가 갈린 순간이었다.

경제 패권은 또 어떤가. 중국은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비단을 생산했다. 양잠 기술은 철저하게 보호됐다. 애벌레가 생사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단을 독점한 중국은 부를 축적했다. 실크로드가 만들어질 정도로 수요는 폭발했다. 가격이 너무 치솟자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특단의 조치를 낸다. 양잠 비법을 알아내면 막대한 포상금을 주겠다는 것이다. 552년 수도사 2명이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잠입해 누에고치를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기술 스파이인 셈인데 비단 독점은 그렇게 무너졌다.

패권을 쥐기 위한 기술 쟁탈전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국익 앞에서는 동맹에 대한 고려도 없다. 냉혹함만 있다. 미국은 지난해 8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과시켰다.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은 또 어떤가. 미국은 동맹국의 반도체 기업에 독이 든 성배를 안기려 하고 있다. 급기야 유럽도 가세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유럽판 IRA’인 핵심원자재법(CRMA)을 냈다. 중국산 광물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IRA 보조금에 맞서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전면전이다.

한 치의 양보가 없는, 기술 패권을 둘러싼 싸움에서도 우리는 눈치만 보고 있다. 기업은 전선 한가운데서 애가 타는데 정부는 “기업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말만 반복할 뿐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회 역시 마찬가지다.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R&D)과 투자, 인재 육성 방안을 담은 ‘국가전략기술육성특별법’은 먼지만 쌓이고 있다. 말로만 과학기술 강국이다.

중세 유럽 1000년은 과학·기술의 암흑기였다. 그래도 각성한 유럽은 이슬람으로부터 역수입한 선조의 유산을 토대로 근·현대의 패권을 쥔다. 조선왕조 500년, 아니 그 이전까지 통틀어 대한민국이 잘살았던 시기는 지금의 40~50년이 사실상 유일하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각성이 없다. 100년 뒤 후세들에게 유일하게 잘살았던 기록으로 남을까 그것이 두렵다.


이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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