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위치한 열화당책박물관 4층 서재 한편에 한자로 쓴 문구가 눈에 띈다.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이다.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책다운 책을 만들겠다는 철학이 이 세 글자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기웅(83) 열화당 대표는 책에 미친 사람이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강원도 강릉 선교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971년 열화당의 문을 열며 출판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후 52년간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세상에 선보인 서적만 1000여 권. 초창기에는 한국과 동서양 미술 전 영역을 망라한 책을 내놓아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출판사의 절반이 입주한 파주출판도시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책과 이 대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오직 책으로만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책은 내 자존심이 될 것입니다.”
이 대표는 글과 책을 논할 때마다 강조하는 게 있다. 생각하는 출판이 그것이다. 긍정과 생각의 힘으로 가치를 세우고 상대와 다투지 않고 함께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책의 임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거기에 아름다우면서 긍정적인 것까지 생각하며 책을 내야 한다”며 “그래야 우리 사회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분열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치가 바로 선 사회에서 친일과 반일, 좌와 우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갈등을 조장하고 평화를 해치는 행위다. 우리 근현대사를 안중근 의사에게 물어보고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안중근에게 중요한 것은 분열과 평화를 누가 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며 “일본인이라고 모두 악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항해야 하는 것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권력과 군국주의 세력”이라고 덧붙였다.
50년 넘게 출판계의 냉혹한 시장 논리를 경험했으니 이제는 어느 정도 자본의 논리에 순응할 때가 됐건만 이 대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순위는 예나 지금이나 ‘돈’이 아닌 ‘책’이다. 2016년 ‘정본 백범일지’를 펴낼 때의 일이다. 김구 선생의 뜻을 최대한 그대로 전하기 위해 거의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그것도 가로쓰기가 아닌 세로쓰기로 내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교수가 ‘서점에 깔린 백범일지가 한두 권이 아닌데 또 내면 장사가 되겠냐’라고 핀잔을 줬다고 한다. 그는 “그 교수에게 ‘내 천직은 책을 만드는 것이지 장사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며 “제대로 된 백범일지가 없어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은연중 장사꾼 취급을 하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책다운 책’을 강조하는 그의 눈으로 볼 때 요즘 출판 시장의 흐름은 아쉽기만 하다. 우선 최소한 갖춰야 할 격(格)이나 순서도 갖추지 못한 채 요란한 디자인과 현혹시키는 글로 재주만 피우는 책들이 시장에 쏟아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유튜브 등의 인기를 업고 등장한 에세이다. 이 대표는 “문명을 탄생시킨 위대한 도구인 문자가 요즘은 오히려 무책임한 말과 미사여구로 사람을 해하고 있다”며 “남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혼자 중얼거리는 의미 없는 책들은 빨리 걷어내고 우리의 진솔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해야 할 때”라고 꼬집었다.
시장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중 가장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책의 남발이다. 그는 많이 팔기 위해 책을 무분별하게 찍어내다 보니 환경이 파괴되고 시장이 무너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강조하는 게 ‘조금 찍고 같이 많이 벌자’는 제안이다. 이 대표는 “요즘 출판사들은 1만 부를 기준으로 책을 내놓지만 소화되는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며 “결국 나머지 새 책들은 모두 폐지가 된다. 어마어마한 남용이 아닐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미치겠다’는 표현을 쓸 정도다. 책은 편집자의 영역인데 정치가 뛰어들면서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는 올바르고 중립적인 자세의 편집자가 역사학자와 손잡고 전권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며 “그래야 책다운 책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