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갈등으로 한국이 반도체를 비롯한 전략산업에서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유치할 수 있는 경쟁력이 취약해졌다는 평가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나왔다.
5일(현지 시간) IMF는 ‘글로벌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세계 경제가 미국과 중국 주도의 양 진영으로 갈라지는 상황이 FDI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다. IMF는 미중 갈등으로 각국이 공급망을 다시 자국에 구축하는 ‘리쇼어링’과 동맹국 등 우방으로 이전하는 ‘프렌드쇼어링’에 나서는 상황에 주목했다. 그 결과 FDI가 투자국과 지정학적 입장이 유사한, 즉 같은 블록에 속한 나라에 갈수록 집중되고 있으며 특히 전략산업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역별로 보면 미국과 유럽에 대한 FDI는 증가한 반면 중국 등 아시아에 대한 FDI는 감소했다. IMF가 반도체 등 전략산업 FDI지수를 산출한 결과 지난해 4분기 현재 미국은 142.8, 유럽은 107.1을 기록했다. 지수는 2015년을 100으로 놓고 수치가 높을수록 FDI 건수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중국은 지난해 4분기 40.1,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는 71.5로 미국과 유럽에 크게 못 미쳤다. IMF는 FDI의 블록화를 촉발한 요인으로 미국의 반도체지원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대(對)중국 수출 통제를 꼽았다. 이날 IMF는 지정학적 갈등의 상대적 승자와 패자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FDI 자금이 중국과 베트남을 떠나 다른 아시아 국가와 유럽으로 향하면서 미국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캐나다와 한국이 상대적으로 승자가 됐다고 평가했다.
다만 IMF는 한국을 전략산업 유치 경쟁력 측면에서는 취약한 나라로 분류했다. 세계 각국이 아무리 다른 나라가 투자처로서 경쟁력이 있고 정치적으로 친밀하더라도 핵심 산업은 결국 자국에 유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IMF는 미국과 독일 등 다수의 선진국도 전략산업에서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진단했다.
IMF는 세계 경제가 미국과 중국으로 분절돼 양 진영 간 투자가 어려워지는 상황을 가정했을 때 장기적으로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약 2% 감소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가령 미국에 다른 나라 기업이 진출할 경우 경쟁이 격화하며 기존 미국 기업의 생산성이 향상될 수 있다. 또 베트남에 외국 대기업이 공장을 세우면 부품을 납품하는 베트남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FDI의 분절화 및 축소는 이런 기회를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IMF는 특히 신흥국의 경우 선진국으로부터의 투자가 감소해 앞선 기술과 노하우에 대한 접근성이 줄어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진영에서도 일본과 한국·독일 등 중국과 경제 관계가 깊은 국가가 있어 피해가 무시할 수준은 아닐 것이라고 보고서는 관측했다.
한편 IMF는 이번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연기금·보험사·헤지펀드·사모펀드 등 비은행금융기관(NBFIs)의 위험성도 경고했다. 보고서는 전 세계 금융자산의 5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비은행금융기관이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으로 취약해졌다고 우려했다. 유동성 미스매치, 늘어난 부채비율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데다 전통 은행권과의 연계성도 높아져 전반적인 금융 안정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IMF는 지난해 9월 영국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던 연기금 사태를 언급했다. 리즈 트러스 당시 영국 총리가 재원 없는 대규모 감세 계획을 발표하자 영국 국채 가격은 급락했다. 레버리지를 일으켜 자국 국채에 투자했던 영국 연기금들은 국채 가격이 급락하자 마진콜(증거금 납부 요구)에 직면했고 이에 영국중앙은행(BOE)이 긴급 개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IMF는 “수년간 비은행금융기관에 대한 경고가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여전히 이 분야에는 낮은 수준의 규제와 감독만 가해지고 있고 이들 기관은 실질적인 손실 흡수 자본도 갖추고 있지 않다”며 “정책 입안자들은 적절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