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셋집살이를 끝내고 본집으로 돌아간 한국은행 직원들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제대로 된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공간이 비좁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화장실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전체 공사비 3600억 원을 어디에 썼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 취임 이후 1년 동안 처우 개선이 이뤄지지 않아 쌓여왔던 불만이 통합별관 입주 등을 계기로 터져 나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일 복수의 한은 직원에 따르면 IT전략국이 사용하는 신축 본관 6층에 하루 세 번이나 변기가 역류해 오물이 솟구쳤다. 한은은 지난달 말부터 삼성본관 등에 흩어져있던 부서들이 완공된 본관과 통합별관 등으로 이전하고 있다. 해당 부서는 이달 초 본관으로 이전하자마자 이같은 문제가 터진 것이다.
문제의 사태 이후 한은 직원들은 쓴 휴지를 절대 변기에 버리지 말라거나 물을 내리는 동시에 화장실 문밖으로 뛰쳐나와야 한다는 웃지 못할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어느 층이나 변기가 늘 막혀있어 화장실을 편하게 이용하지 못한 것은 예삿일이 됐다. 한은 시설 관련 부서 담당자는 “페이퍼타올을 집어넣어 역류한 것이고 구조적 결함은 아니다”라며 “건물 전체 화장실을 점검한 결과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개인 업무공간이 비좁아진 것도 불만이다. 공간이 좁다 보니 등을 맞대고 앉은 사람과 동시에 일어서면 부딪히는 일이 다반사고, 머리를 조금만 뒤로 젖히거나 기지개를 켜면 뒷사람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일부 부서는 책상만 간신히 놓을 정도의 공간만 마련돼 있어 업무용 보조 책상마저 뺐다. 또 창문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 숨 쉴 여유도 없이 책상만 가득해 닭장 같은 공간도 있다. 비가 내린 지난 18일엔 건물에 빗물이 샜는데 차라리 그 정도는 참을만하다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온다.
그나마 어린이집이나 체력단련실, 구내식당 등 공용공간은 크게 개선됐다. 넓고 쾌적할 뿐만 아니라 기존엔 없던 휴식 공간도 생겼다. 그렇지만 직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긴 역부족이다. 회의실이 늘었다고 해도 부서 대부분이 비슷한 시간대에 회의하다 보니 자리 잡기 경쟁이 일어난다는 전언이다.
한은 직원들은 완공 이후로도 마감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문을 발견할 때마다 땅값도 들지 않았는데 3600억 원이 넘는 돈을 어디에 썼냐며 울분을 터트리고 있다. 한은은 통합별관 건축 계약을 조달청에 일괄 위임했고 조달청은 2019년 11월 계룡건설과 2832억 원에 계약을 체결했는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관급금액 528억 원을 합치면 전체 공사금액은 3360억 원이다.
이후 물가 상승 등으로 계약 변경이 이뤄지면서 257억 원이 한 차례 추가됐고, 현재 추가 비용 인상에 대한 검토도 진행 중이다. 또 한은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삼성생명본관에 잠시 세를 들면서 4년간 624억 원을 냈는데 착공 지연 등으로 2년이 추가되면서 312억 원을 더 냈다. 종합하면 전체 공사비는 3617+α로 4000억 원에 가까워지고 그 기간에 쓴 임대료까지 더하면 4553+α로 불어난다.
직원들이 공사비에 민감한 이유는 막대한 돈을 들여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정작 직원들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 직원 급여는 사실상 기획재정부가 정하는데 임금 인상률이 수년째 0~2% 수준에 머물면서 다른 금융공기업과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산업은행과 한은의 1인당 평균 보수액 차이는 2016년 연간 158만 원이었는데 2021년 기준 1336만 원까지 벌어졌다. 한은이 ‘신의 직장’이라는 말은 사라진 지 오래됐고 박탈감을 느낀 젊은 직원들은 매년 빠르게 이탈하고 있다.
특히 이 총재가 지난해 4월 취임하면서 직원 처우 개선을 먼저 언급해 기대를 키웠던 만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내부 여론은 최근 한은 노동조합이 공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달 3~13일 한은 노조가 실시한 이 총재 1년에 대한 평가 조사에 조합원 1002명이 참여했다. 한은 전체 임직원이 2430명이고 노조 가입률이 58.9%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많은 수치다.
해당 조사에서 직원들은 이 총재 취임 이후 직원 처우가 적정 수준으로 회복됐냐는 질문에 무려 93%가 그렇지 않다고 평가했다. 직원들은 급여가 금융공기업 평균 정도만 돼도 적절하다고 본다. 이 총재의 내부경영을 평가하는 질문에 절반에 가까운 직원들이 못했거나(32%) 매우 못했다(14%)고 답했다. 잘했거나(2%) 매우 잘했다(12%)는 긍정적 평가는 14%에 그쳤다. 이 총재 취임 이후 업무량은 급격히 늘었는데 처우는 나아지지 않다 보니 불만이 누적되고 있다.
다만 기재부가 한은의 인건비를 결정하는 구조가 한은법에 규정돼 있다 보니 이 총재도 당장 손 쓸 방법은 없다. 한은 내부에선 금융통화위원회가 인건비를 결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지만 한은법 개정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통합별관 입찰 문제를 일으킨 조달청에 대한 불신에 급여를 결정하는 기재부에 대한 불만까지 고조되는 상태에서 21일 새로 취임하는 박춘섭 금융통화위원 후보자에 대한 내부 시선도 곱진 않다. 박 후보자는 기재부 예산실장을 지낸 예산 전문 관료로 이후 조달청장까지 역임했다. 하필이면 박 후보자가 조달청장이었던 2017년 12월 조달청이 계룡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하면서 입찰가를 589억 원이나 낮게 써낸 삼성물산이 반발해 전체 공사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후 분쟁 조정 청구, 감사원 감사, 소송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계획보다 2년 늦게 착공해 한은에 손실이 발생했다. 한은은 통합별관 공사가 입찰 문제로 지연돼 손해를 입었다며 조달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특히 한은 노조는 통화정책 독립성을 저해한다며 기재부 출신이 금통위원이나 감사로 내정 때마다 반발해왔다. 과거 관료 출신이 임명됐을 땐 출근 저지 투쟁까지 벌인 바 있다. 이번에도 한은 노조는 “거시경제와 관련해 뚜렷한 행적이 없었던 기재부 예산 관료 출신이 한은 금통위원으로 부임하게 된다”며 “기재부는 인건비 통제도 모자라 일반예산, 더 나아가 통화정책마저 통제하려고 하나”라고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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