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에 번역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합니다. 인간 번역가가 AI와 경쟁하는 시대가 됐죠. 결국 번역가들은 AI 기능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조수’로 활용하는 능력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국내 최고의 번역가로 꼽히는 김석희(71·사진) 번역가는 요즘 챗GPT 논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김 번역가는 20일 서울경제와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쥘 베른 모험소설’(전체 5권, 열림원어린이)로 독자들에게 돌아왔다.
AI 전문가들은 챗GPT로 가장 먼저 사라질 직업으로 번역을 꼽는다는 이야기에 그는 “충분히 수긍한다. 번역 AI가 나오는 것도 머지 않았다”며 “기존 번역이 번역가 개인의 작품인 반면 AI 번역은 일종의 집단 작품이어서 개인은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번역이 새로운 창작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개성이 반영되고 이것이 사회의 자산으로 축적되는 것이다. 개인은 AI를 활용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상황이 됐다”고 덧붙였다.
한국은 상품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이지만 정보와 지식 면에서는 절대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외국의 정보와 지식을 일반인들이 이용하기 위해서는 번역이라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는 번역가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김석희 번역가는 이미 10여년 전에 ‘쥘 베른 걸작선’(20권)을 번역한 적이 있다. 프랑스 작가인 베른(1828~1905)은 ‘SF 과학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이번 신간에 포함된 ‘지구 속 여행’, ‘달나라 여행’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 ‘2년 동안의 방학’은 영원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이번에 다시 5권의 ‘쥘 베른 모험소설’을 내놓은 데 대해서 그는 “아이들에게 과학을 쉽게 읽히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쥘 베른의 글들은 19세기 배경으로 당시 과학지식은 이미 현대에 맞지 않는 것이 다소 있다. 새 책에서는 난해한 부분을 일부 잘라내고 전체 문장들도 더 평이하게 풀어썼다”는 설명이다. 이어 그는 “초등학생 손주의 읽을거리를 위해 구상했는데 이젠 모든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번역에서 특이한 점은 기존에 ‘15소년 표류기’로 알려진 제목이 ‘2년 동안의 방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원래 프랑스어판 원제목은 ‘Deux ans de vacances’로 ‘2년 동안의 방학’이 맞다. 그런데 19세기 말 일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편의적으로 ‘15소년 표류기’가 됐고 국내에 중역되면서 그대로 도입된 것이다.
그는 “한국도 이제 번역 강국이다. 잘못이 있다면 빨리 고치는 게 좋다. (일본어 중역 과정에서 잘못된) 다른 책들도 수정해서 한국 독자들의 새로운 판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김석희 번역가는 서울대 불문학과·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돼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번역에 힘을 써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15권)’ 등 번역서가 약 350종, 400권이나 된다. 이와 함께 소설 작품도 3권이 있다.
다작의 비결에 대해서는 “글을 잘 쓰든지 무엇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자기 관리”라며 “후배들에게도 항상 해주는 말”이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