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100조 개에 이르는 인체 미생물의 변화가 비만·당뇨·암·자폐 등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가 속속 나온다. 장내 미생물을 활용한 마이크로바이옴(미생물 군집·유전체 정보 생태계) 치료제를 연구개발(R&D)하는 곳이 늘어난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 세레스테라퓨틱스는 곧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경구용으로는 세계 최초로 장 질환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를 허가받을 예정이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지놈앤컴퍼니가 글로벌 빅파마와 위암과 담도암 면역 항암제에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를 병용하는 임상을 하고 있다. 자폐증 마이크바이옴 치료제도 개발하고 있다. CJ바이오사이언스와 고바이오랩은 건선, 염증성 장 질환, 천식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박한수 지놈앤컴퍼니 대표는 “5년 뒤 1조 6000억 원 이상의 세계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시장이 열릴 것”이라며 “글로벌 빅파마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틈새를 뚫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3D 바이오프린터로 손상된 장기의 맞춤형 복원에 나서는 재생의료도 뜨고 있다. 인체의 지방을 추출한 바이오잉크를 사용해 면역 거부 반응을 없앤 게 특징이다. 로킷헬스케어의 경우 당뇨병으로 발이 썩는 당뇨발과 망가진 무릎연골 치료를 위한 피부 재생치료 플랫폼을 구축해 해외 수십 개국에서 임상을 해왔다. 만성 신부전증까지 임상 범위를 넓힐 방침이다. 베리필드마켓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3D 바이오프린팅 시장은 2021년 1조 원에서 2030년 5조 7000억 원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석환 로킷헬스케어 회장은 “재생의료 등 첨단 바이오는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우리가 해볼 만하다”며 정부의 지원과 규제 혁파를 촉구했다. 하철원 삼성서울병원 정형외과 교수도 “바이오프린팅을 활용한 연골재생 기술은 관절염 치료에서 획기적 대안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처럼 전통 제약·바이오 시장의 패스트팔로어(빠른 추격자)였던 우리나라가 첨단 바이오 시장에서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 제약 시장 규모가 2021년 1조 4200억 달러(약 1880조 원)로 세계 반도체 시장(5300억 달러)의 2.7배나 되지만 정작 우리의 비중은 미미한 상황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꾀하기 위해서다. 실제 디지털·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융복합 기술을 연계한 첨단 바이오 시장이 급성장하는 추세다. 세포·유전자 치료제, 뇌과학, 재생의료·인공장기, 디지털 치료제, 나노로봇, 혁신 영상·진단기기, 마이크로바이옴, 원격의료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암·치매·노화 극복의 혁신적인 길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식량안보·친환경을 위한 대체육·배양육 같은 푸드테크와 천연물 R&D 등 그린바이오 시장도 뜨고 있다. 합성생물학 등 화이트바이오까지 첨단 바이오 영역도 크게 확장되고 있다. 합성생물학은 보건의료는 물론 바이오 연료·플라스틱 등 에너지·화학, 국방에도 파급효과가 크다.
미중 패권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첨단 바이오는 보건의료·경제안보의 핵심으로 꼽히며 국가전략기술로 통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국가 생명공학·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을 통해 바이오 R&D와 제조 강화, 바이오를 통한 에너지·화학·소재 산업의 혁신을 표방한 것도 이 때문이다. AI와 빅데이터가 발달한 중국은 지난해 5월 ‘바이오 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바이오 굴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럽도 규제 혁신 등 첨단 바이오 생태계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윤석열 대통령이 올 2월 “바이오를 제2의 반도체 산업으로 키우겠다”며 5년 내 연 매출 1조 원 이상 신약 2개 창출, 의약품과 의료기기 수출 각각 2배 확대(각 160억 달러), 디지털·데이터·AI 활용 신의료기술 활성화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미국·중국·유럽 등에 비해 뒤처진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는 셀트리온 등이 복제약 분야에서 글로벌 강자로 군림하고 삼성바이오로직스 등도 바이오의약품 위탁 생산능력이 뛰어나지만 퍼스트무버(선도자)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유한양행·종근당 등 기존 제약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R&D나 매출 모두를 합쳐도 글로벌 빅파마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대학과 국가연구소(출연연 등)의 기술 사업화 생태계도 활성화돼 있지 않고 산학연병(産學硏病) 간 융합연구도 미흡하다. 의대로의 인재 쏠림 현상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쓰는 핵심 약이나 장비는 대부분 외국산이다. 이광형 KAIST 총장은 “의사의 실력이나 디지털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나 의사과학자나 환자를 보면서 R&D를 병행하는 의사가 많지 않다”며 과학기술특성화대의 의학전문대학원 허용을 촉구했다.
바이오헬스 분야의 정부 R&D 투자를 봐도 2020년 1조 3000억 원, 2021년 1조 6200억 원, 지난해 1조 7560억 원으로 증가하다가 올해(1조 7620억 원)는 정체 상태다. 정부 R&D(올해 31조 574억 원) 내 비중도 올해 5.7%로 지난해(5.9%)보다 떨어졌다.
팬데믹 상황에서 전화 상담 등 제한적으로 허용되던 원격진료도 표류하는 양상이다. 정부의 리더십 부족과 의료계의 이기주의가 맞물리며 세계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혁신 의료기기 활성화를 위한 임상·허가, 건강보험 수가책정 등 정책 지원도 미흡하다. 임상도 쉽지 않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허가를 받는 것도 까다롭고 가격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에서 기존 의료기기의 최대 90%까지만 인정해주는 경향이 있다. 벤처기업들이 FDA 등에서 허가를 받으려고 하는 게 이 때문이다. 미국·유럽 등에서는 허가만 받으면 개발사 책임하에 환자에게 쓸 수 있다. 정기택 홍릉강소특구 GRaND-K 창업학교 교장은 “중국도 지난 10여 년간 성별 규제자유구역에서 혁신 의료기기를 많이 내놓으며 한국을 앞질렀다”고 전했다.
미국·중국 등에서 바이오헬스 데이터의 통합·분석을 통해 조기 진단과 치료에 활용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데이터 규제도 심하다. 강대희 서울대 의대 미래발전위원장은 “방대한 데이터를 적극 활용하고 혁신 제품·서비스의 사업 활성화 생태계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