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등 옛소련 국가들에 대해 “국제법상 유효한 지위가 없다”며 주권에 의문을 제기한 루사예 주프랑스 중국대사의 발언이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 외교부가 “옛소련 국가들의 주권을 존중한다”며 수습에 나섰지만 후폭풍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기세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국 중재론’에 기대를 걸었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블룸버그통신은 23일(현지 시간) 루 대사의 발언이 “마크롱이 추진 중인 에마뉘엘 본 프랑스 국가안보보좌관과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간 대화 채널의 가치를 약화시켰다”고 보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채널을 통해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협상을 이끌 기반을 만들고 이르면 올여름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평화회담을 여는 그림을 생각했으나 추진력을 잃게 됐다.
루 대사는 21일 공개된 프랑스 TF1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옛소련 국가들조차 그들의 주권국가 지위를 구체화한 국제적 합의가 없기에 국제법상 유효한 지위를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 영토냐는 질문에도 “그 문제를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달렸다”며 “크림반도는 애초에 러시아 영토였다”고 주장했다. 파문이 확산되자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4일 정례 브리핑에서 “소련 해체 이후 독립국가들이 주권국가로서 지위를 얻게 됐다”며 “중국은 이들 국가와 우호적·협력적 관계를 발전시켜왔다”고 해명했다.
중국 외교부의 노력에도 루 대사의 발언이 상당히 문제적이라는 점에서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발언은 서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제재의 근거로 삼은 유엔헌장 내 주권국 영토 침해 금지 조항을 근본적으로 거스르기 때문이다. 이런 발언까지 나온 마당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데 중국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 마크롱 대통령의 노력도 힘을 받기는 어렵다. 마크롱 대통령은 방중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유럽의 대외 정책이 미국을 추종한다는 점을 경계하며 ‘대만 수호가 국익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발언해 논란을 사기도 했다.
한편 유럽 곳곳에서는 루 대사의 발언에 강력히 반발했다. 주제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루 대사의 발언을 “용납할 수 없다”고 규탄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당혹스럽다”며 이 발언이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지 명확히 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옛소련 국가들에 대해 “수십 년의 억압 끝에 독립을 쟁취한 모든 동맹국과의 완전한 연대를 강조한다”고 덧붙였다.
당사국들도 반발했다. 바딤 오멜첸코 주프랑스 우크라이나대사는 트위터에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 영토라는 데는 모호성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에드가르스 린케비치 라트비아 외무장관은 트위터에 “용납할 수 없는 발언에 따른 조치”로 발트 3국이 일제히 중국 대사를 초치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