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혹한기 속에서도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 벤처·스타트업으로는 자금이 몰리고 있다. 성장이 기대되는 ‘반·배’ 벤처기업 투자를 선점하기 위한 벤처캐피털(VC)간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갓 설립한 기업인데도 반·배 관련 기업은 수백억원의 기업가치를 요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26일 벤처투자 정보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 분야 스타트업이 유치한 투자 금액은 5222억 원을 기록했다. 2021년 2335억 원에 비해 2배 넘게 증가한 수치다. 지난해 대비 총 벤처투자 금액이 70% 가까이 줄어든 올해 역시 4월 기준 932억 원을 투자유치 해 반도체 투자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는 분위기다.
최근에는 아날로그반도체 설계 기업인 ‘관악아날로그’가 VC들로부터 60억 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해 주목을 받았다. 아날로그반도체는 빛과 소리·압력·온도 등 각종 신호를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는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비메모리(시스템)반도체로 전기차와 스마트폰 등에 사용된다. 관악아날로그는 미국 IBM왓슨연구소 연구위원 출신으로 반도체 분야 권위자인 김수환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가 창업했다.
배터리 분야 역시 2020년 767억 원, 2021년 1641억 원, 2022년 2551억 원으로 매년 가파르게 투자유치 금액이 늘고 있다. 특히 올들어 4월까지 이미 1156억 원의 투자가 이뤄져 지난해 절반 가량의 자금을 유치했다. 시장에서는 그동안 내수 시장에 기반한 플랫폼 업체들이 국내 유니콘 그룹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앞으로는 해외에서도 통하는 기술력을 갖춘 딥테크들이 주류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한다. 누적 기준 1056억 원을 유치한 2차전지 양극재 스타트업 에스엠랩은 유니콘 입성이 기대되는 대표적인 회사 중 하나로 꼽힌다. 누적 기준 975억 원을 투자 받은 바나듐 전지 스타트업 스탠다드에너지도 최근 약 7000억 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카카오벤처스마저 신규 투자를 잠정 중단할 정도로 벤처투자 시장이 얼어붙고 있지만,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는 오히려 VC들이 서로 투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플랫폼 분야 대형 스타트업들이 기업가치를 대폭 깎는 것을 감수하고 후속 투자를 울며 겨자먹기로 유치하고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한 VC 대표는 “반도체 분야는 스펙이 좋은 창업가가 좋은 팀만 만들어오면 서로 투자를 하겠다고 줄을 섰다”며 “이제 막 설립한 기업인데도 200~300억 원의 기업가치를 당당하게 요구할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실제 차세대 배터리,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핵심 원천기술을 가진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를 집중해온 DSC인베스트먼트의 자회사인 액셀러레이터 슈미트는 최근 운용자산(AUM)이 1535억 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공격적인 초기 투자를 통해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액셀러레이터들의 AUM이 수십억 원에서 수백 억 원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슈미트의 운용자산 규모는 매우 이례적”이라며 “그동안의 투자 기록을 감안하면 앞으로 배터리, 반도체 등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려는 포석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