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멕시코 테카테 출신의 한 살짜리 남자아이 ‘키키토'의 초대형 사진이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따라 내걸렸다. 길이 약 21미터(m)의 이 거대한 작품은 멕시코에 설치 됐지만 미국에서 더 잘 보이는데 마치 아이가 국경의 울타리 너머를 응시하는 듯하다.
아이의 사진이 내걸린지 한 달째, 사람들은 이 곳에서 대규모 피크닉을 연다. 키키토와 그의 가족, 미국과 멕시코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 피크닉 장소에는 불법체류 청년을 가리키는 ‘드리머’ 중 한 명의 눈을 찍은 작품이 설치됐고, 사람들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물을 마시며 음악을 즐겼다. 밴드의 뮤지션들은 반으로 나뉘어 국경의 양쪽에서 공연했다.이 작품은 제이알(JR):클로니클스의 ‘키키토’다.
제이알은 예술이 없는 곳에 예술을 설치하는 공공미술 사진 작가다. 2019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독일 뮌헨 쿤스트할레에 이어 롯데 뮤지엄에서 아시아 최초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도시의 건물과 거리를 캔버스와 갤러리 삼아 활동해 온 작가의 지난 20년의 행보를 조망한다.
1983년 동유럽과 튀니지 이민자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제이알은 어린시절부터 거리에서 그래피티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2001년 파리의 한 지하철에서 우연히 삼성전자의 카메라를 습득, 사진 작가의 삶을 시작한다. 초창기 그는 동료들의 그래피티 활동을 기록하며 거리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들과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으나 2005년 10월 파리 외곽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를 카메라에 담고, 파리 도심 곳곳의 건물 파사드에 거대한 초상화를 설치하며 ‘세대의 초상’이라 불리는 첫 프로젝트를 완성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세대의 초상’은 이번 국내 전시의 출발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관람객은 한 유색인종이 총을 들고 있는 대형 사진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사실은 총이 아닌 카메라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단지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카메라를 총기로 착각하는 미디어 왜곡 효과를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후 전시는 작가의 공공 프로젝트를 비롯한 20년 간의 작품 140여 점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여기에는 사진 작품 뿐 아니라 영상, 아나모포시스(왜상), 휘트 페이스트업(콜라주처럼 이미지를 잘라붙인 작품) 등이 포함된다. 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 사진전으로 알려진 ‘페이스 투 페이스’ 프로젝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형 초상을 베들레헴, 텔아비브, 예루살렘 등 8곳이 넘는 도시에 부착하는 방식의 전시로, 사진만으로는 이들의 국가와 직업을 분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두 지역을 갈라놓은 벽의 의미를 고찰한다.
제이알의 작품은 범죄와 어둠이 있는 곳에 늘 존재한다. 2008년 브라질의 도시에서 군인의 불심검문을 거부하던 무고한 청년들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소요사태를 보고 ‘여성은 영웅이다’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작가는 그곳에서 여성들의 눈과 얼굴을 찍은 사진으로 설치 작업을 완성했는데, 이 사진을 크게 확대해 다른 지역에서도 보이도록 연출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작가의 관점은 2011년부터 전세계 149개국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와 2017~2019년 진행된 ‘연대기 프로젝트’를 통해 절정에 달한다.
교도소 외벽에 산을 그려 마치 재소자들이 담장이 낮은 교도소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이를 통해 재소자들의 삶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게 한 ‘테하차피’도 이번 전시에 함께 소개된다. 이 작품은 재소자들과 함께 제작했는데 작업에 참여한 재소자 중 3분의 1가량이 보안 등급이 낮은 교도소로 이감되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작가는 예술을 통한 소통의 힘을 보여주는 데 평생을 집중한다. 이를 통해 시대의 편견과 맞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이끌어내 공공예술의 의미를 확장한다. 전시는 5월 3일부터 8월 6일까지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