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초래한 자유무역 질서의 붕괴와 첨예해진 미국·중국 갈등, 글로벌 블록화라는 국제 질서 전환 속에서 10일 출범 1년을 맞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속도를 내고 있다. 한미 동맹 강화와 한일 셔틀외교 복원을 토대로 한미일 삼각 공조도 궤도에 올랐다. 올 1월 한국국제정치학회장으로 취임한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1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 외교 노선의 방향성은 옳다고 본다”고 평가하면서도 “한미일 협력이 한국 외교의 종착점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윤석열 정부를 향해 “기존 국제 질서가 크게 변화하는 ‘세계화 2.0’ 시대에 한국이 글로벌 중심국으로 발돋움하려면 한미·한일 외교를 디딤돌 삼아 다자 무대에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근 국제 질서의 변화를 어떻게 진단하는가.
△전후 70년 동안 지속된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지금 커다란 변화의 길목에 놓여 있다. 전환 시점이 코로나19 발발과 맞아떨어지면서 세계화 30년에 대한 반성도 맞물려 있다. 하지만 당장 자유주의를 대체할 대안적 질서가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이나 중국 영향력의 한계를 감안할 때 미국이 주도하는 기존 질서가 소위 ‘강대국 정치의 부활’이나 ‘신냉전’으로 대체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기존 질서의 구조적 조정, 특히 다자주의 질서의 변화를 중심으로 하는 조정 국면을 맞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다자주의 질서의 조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구체적으로는 미국이 여전히 국제적 제도를 이끄는 가운데 전 세계에 최소 5~6개 블록이 형성되면서 과거 경험하지 못한 다자 질서의 병립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와 중국·러시아 등 그에 대항하는 질서, 인도·브라질·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독자 노선, 또 다른 형태의 결속력을 보일 유럽, 동아시아의 질서 등이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의 국제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다자 질서가 공존하는 ‘세계화 질서 2.0’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다자 외교에 취약한 한국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다자 질서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미국 패권을 위협하지는 않는다는 뜻인가.
△중국은 세계화가 진전된 지난 30년간 그랬던 것처럼 글로벌 생산·소비 시장의 허브 역할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다만 중국의 경제력이 과거의 영국이나 오늘날 미국과 같은 정치·제도적 리더십으로 전환되기는 어렵다. 중국은 바다 건너 국경을 접한 나라까지 총 20개국에 달하는 주변국 관계에 막대한 외교적 자산을 투입한다. 그럼에도 이 국가들 대부분에 반중(反中) 정서가 팽배한 것은 중국이 ‘힘’을 행사하는 방식 때문이다. 팔로십(followship)이 없는 리더십은 있을 수 없다. 러시아의 경우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2등 국가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1.5등 국가로의 추락이 불가피해 보인다.
-미중 패권 경쟁은 갈수록 격화하고 있는데.
△지난해 하반기 이후 격화한 미중 갈등은 내년 1월 대만 총통 선거까지 첨예하게 전개된 뒤 완화할 가능성이 크다. 대립 일변도였던 과거 미·소 관계와 달리 미중 관계에는 극단적 갈등과 협력이 공존한다. 미국과 중국 모두 이러한 양국 관계의 본질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공급망 재편과 대만 선거가 끝나고 아시아에서 미국 중심의 한미일 동맹 질서가 안착되는 내년 초에는 갈등·협력의 공존이라는 미중 관계의 특수성이 좀 더 두드러질 것이다.
-미국이 제기하고 있는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없는가.
△중국이 대만을 무력 침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침공으로 얻을 득보다 실이 크다고 중국 스스로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에 그랬듯이 중국 입장에서 대만 침공은 국제사회가 몰랐던 자국의 실체적 능력을 드러내는 ‘큰 실수’가 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쉴 새 없이 전쟁 수행 능력을 다져온 미국과 달리 중국 군대의 실전 경험은 사실상 없다. 러시아·인도 등 역사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대국들과 국경을 맞댄 중국이 모든 군사적 자원을 대만에 투입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 집권 후 한미 관계가 공고해지면서 한중 관계에서는 어려움이 예상된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 기조는 맞다고 본다. 초강대국인 중·일·러에 둘러싸여 동북아라는 ‘섬’에 갇혀 있는 한국 입장에서 한미 동맹은 강할수록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미 동맹 강화는 자유주의 70년 질서에서 우리가 얻은 혜택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미국을 강조하는 것이 중국을 비롯한 미국 이외의 파트너를 포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윤석열 정부가 ‘균형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데.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균형 외교’는 과거 노무현 정부 이후로 약 20년간 한국의 외교 목표였다. 하지만 미중 간 ‘거리적 균형’이라는 개념의 균형 외교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다. 우리가 추구할 균형 외교는 ‘이익의 균형’이라는 개념으로 재정립돼야 한다. 외교 정책의 기준과 원칙을 정해두고 상황에 따라 이익에 맞게 선택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원칙에 맞추는 것 아니냐는 중국 측 불만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고 본다.
-지난달 한미 정상이 발표한 ‘워싱턴 선언’은 북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어떤 나라든 미국을 상대로 그 정도의 군사적 합의를 도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워싱턴 선언은 의미 있는 성과라고 평가한다. 윤석열 정부 외교가 투박하고 거칠지만 역대 정권에서 미국과 일본 등 강대국을 상대로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쥔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윤석열 정부의 외교적 추진력과 비전은 인정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도 군사적으로만 보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주도성과 제안 능력을 강화함에 따라 북한을 외교적으로 위축시키는 효과를 거둘 것이다.
-한일 외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적지 않다.
△아직 일본이 적극적이지 않아 아쉬운 측면이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첫 방한에서 내놓은 발언과 현충원 방문 행보로 우리 국민의 마음을 달래기에는 아직 간극이 있다. 앞으로 양국 관계에서 창출될 경제 및 안보 이득이 그 간극을 어느 정도 메울 수는 있겠지만 보다 구체적인 성과가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윤석열 정부의 과제다. 한일 관계에서는 위기의 ‘횡적 전환’이 매우 심각하다. 독도 영유권 문제나 교과서 왜곡 등 한 가지 이슈가 터지면 다른 외교 영역을 모두 장악해버린다는 뜻이다. 그 전환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겠지만 역사나 영토 이슈가 다른 영역을 침해하는 것을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관리된다면 한일 양국이 전략물자 등 경제적으로 새로운 공간에서 협력할 사안들을 많이 만들어서 1970~1980년대와 같은 한일 동반 성장의 기회를 다시 만들기를 바란다.
-한국의 취약점인 다자 외교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한국은 지금껏 보편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춰야 하는 다자 무대에서 어젠다를 설정하거나 이니셔티브를 쥐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에너지부터 환경·기후변화·인권·식량·젠더 등 우리가 역량을 발휘할 다자 무대는 많다. 북한이 걸려 있는 인권 문제나 젠더, 과거 경험을 살린 공적개발원조(ODA) 등은 한국이 보편적 솔루션을 제공할 능력을 갖는 영역이라고 본다. 이 분야들에서 한국이 주도해 다자 무대의 판을 깔 필요가 있다.
-취임 1년을 맞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해 조언한다면.
△강대국에 치중된 외교와 대통령이 과도하게 외교 주도성을 갖는 것은 한국 외교의 고질적인 문제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 노선에 찬성하지만 한일 관계 정상화와 한미 동맹 강화, 한미일 협력이 우리 외교의 궁극적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이를 디딤돌 삼아 국제사회의 보편적 이익으로 한국의 외교적 관심을 전환하고 국제사회의 중심국으로 발돋움해야 한다. 특히 미국 선택이 중국 포기로 비쳐서는 안 된다. 중국과의 경제 관계가 끊기면 한국은 버티지 못한다. 윤석열 정부 외교의 방향성은 옳지만 추진 과정에서 좀 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는 신중함, 국민적 지지를 받기 위한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외교는 대통령만의 어젠다가 아니다. 국회와 민간 기업, 시민사회, 언론 등 모두가 외교 행위자다. 다른 행위자와의 동반자 의식을 갖고 조금 더 섬세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He is···
1967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올해 1월부터 한국국제정치학회장을 맡고 있다. 대통령 안보자문위원, 통일준비위원회 전문위원, 외교·통일·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통일부 통일미래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