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336조 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의 왜곡을 부른 ‘커닝 공시’ 규제에 나선다. 퇴직연금 사업권이 없는 비사업자에도 사업자와 동일한 규제를 적용해 ‘꼼수’로 금리를 올려 잡는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사업자·비사업자 간 과도한 금리 경쟁을 차단해 매년 되풀이되는 대규모 자산 이동과 시장 혼란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11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금융위가 주관한 퇴직연금 운용 규제 태스크포스(TF)는 사업자에게 적용되는 금리 사전 공시 의무를 비사업자에게도 적용하고 비사업자들이 받는 상품 제공 수수료도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금융위는 상반기 내 입법 예고를 거쳐 이르면 7월 초 이 같은 방한을 시행할 계획이다.
금융위가 퇴직연금 비사업자에 대한 규제에 나선 것은 지난해 말 벌어진 퇴직연금 상품의 과도한 금리 출혈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퇴직연금 사업자는 매달 ‘다음 달 3영업일 전’에 각 사 홈페이지에 퇴직연금 금리를 공시해야 한다. 하지만 공시 의무가 없는 비사업자들이 공시된 이율을 다 살펴본 후 이보다 높은 수준에서 금리를 정하는 커닝 공시가 반복돼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금융감독원이 이율 공시에 대해 행정지도에 나섰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사업자와 비사업자 간 금리 격차가 적게는 1%포인트에서 크게는 2%포인트까지 나며 시장 왜곡이 심화했다. 이에 법적 구속력이 없는 행정지도에서 한 발 나아가 공시 의무를 제도화한 것이다.
비사업자들의 주요 수익원이던 상품 제공 수수료도 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사업자들은 통상적으로 비사업자들의 상품을 가져다 쓰면서 30~70bp(1bp=0.01%포인트)의 수수료를 지불했다. 증권업에서는 고금리 금융 상품인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를 주로 취급했고 보험 업권은 이율보증형보험(GIC)과 같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제공해왔다. 사업자는 퇴직연금 가입 고객으로부터 자금을 직접 유치해 관리할 수 있다. 비사업자는 사업자에게 금융 상품을 제공하는 일만 가능하다.
문제는 비사업자들이 높은 금리의 상품을 앞다퉈 내놓으면서 사업자들이 가입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수수료를 내며 상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졌다는 점이다. 또한 금리를 높게 써낸 업체에 자금이 쏠리면 기존 사업자가 보유 채권을 매각해 원금을 돌려주고 이 과정에서 채권 공급이 대규모로 늘어나 시장의 혼란을 야기했다. 이에 금리 공시 의무와 함께 조달 수수료도 규제해 과도한 경쟁을 억제하겠다는 것이 금융 당국의 구상이다. 다만 수수료 수익 비중이 높은 일부 보험사들의 반발이 커 폐지 절차를 단계적으로 밟아나갈 계획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상품 제공 수수료는 꼼수 공시와 함께 시장을 혼탁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며 “급격한 퇴직연금 ‘머니무브’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ELB의 편법 사모 발행을 금지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과거 증권 신고서를 안 내도 되는 것처럼 눈속임을 통해 사모 발행을 하는 행태가 있었는데 최근 증권사들이 자금 조달을 위해 ELB를 경쟁적으로 쏟아내자 통제에 나선 것이다. 사용자의 계열사 발행 증권 편입 한도를 차등 개선하는 방안도 유력하다. 개인형 퇴직연금 계좌(IRP·DC)에 한해 규제의 빗장을 푸는 것으로 DC형은 10%에서 30%로 한도를 높이고 IRP는 한도 자체를 폐지하는 식이다. 과거 한국수력원자력 직원들이 한국전력에서 분리됐는 데도 계열사 편입 한도 규제 때문에 ‘한전채’를 담지 못하면서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