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경제성장률이 1% 초반으로 떨어지는 상황까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11일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2023년 상반기 경제전망’을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2월 이후 3개월 만에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8%에서 1.5%(상반기 0.9%, 하반기 2.1%)로 낮추는 동시에 이보다 더 나쁜 시나리오까지 발생할 수 있음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정 실장은 “하반기 반도체 수요 회복이 가시화되지 않고 중국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효과가 중국 내 서비스업을 넘어 투자 부문까지 퍼지지 못하면 우리 경제 회복이 지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에서는 이미 이런 상황이 실제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먼저 반도체 수요 회복이 점점 뒤로 밀리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PC와 모바일 등 소비자 수요도, 산업용 수요도 회복세를 타고 있다는 기미가 없다”며 “반도체 감산 효과 역시 통상 4~6개월 시차를 두고 나타나기 때문에 연말까지는 상황이 별반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KDI 역시 “반도체 경기가 2001년 IT 버블 붕괴,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아주 심각하게 부진하다”며 “올 1~4월 기업 실적을 보면 하반기 회복 속도도 예상보다 더딜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경상수지 흑자 폭 전망치를 기존 275억 달러에서 164억 달러로 40% 넘게 낮춘 배경이기도 하다.
하반기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됐던 중국 리오프닝 효과도 생각보다 작을 수 있다는 전망이다. 중국 리오프닝이 한국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주려면 제조업 중심으로 생산·투자 회복세가 확연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재고 수준이 높아 투자심리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중국이 미국과의 갈등 등으로 내수 중심 성장으로 무게를 옮기고 있고 기술적 수준도 업그레이드되면서 중간재 수출 중심의 대중 교역을 해온 우리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갈수록 줄고 있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KDI는 “중국의 소비자 및 고용 관련 심리 지표도 부진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 경기 회복이 완만한 속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강한 여행 수요로 그나마 민간소비 회복세는 뚜렷하다. 이에 KDI는 올해 민간소비 증가율 전망치를 2.8%에서 3.0%로 높였다. 하지만 최근의 회복세가 우리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약하다는 평가다. 민간소비는 우리 국민의 국내·해외 소비의 총합인데 최근의 민간소비 상승세는 우리 국민의 해외 소비 증가가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해외 소비는 국내 부가가치 창출에 포함되지 않기에 우리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부터 누적된 원가 부담이 물가에 본격 반영되며 고물가가 우리 경제에 구조적으로 자리할 조짐이 보이고 있다. KDI는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는 서비스 가격을 중심으로 3.5%의 높은 상승률(기존 전망 3.4%)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통계청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인건비와 재료비 등 원가 상승 압력이 높았다”며 “업체들이 누적된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올 들어 줄줄이 가격을 올리며 근원물가를 자극하는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전기료 인상이 늦어지며 소비자물가상승률 전망치는 3.5%에서 3.4%로 낮아졌지만 여전히 물가 목표 수준(2%)과 비교하면 높다.
KDI는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지출 확대는 여전히 높은 물가를 추가로 자극할 수 있기에 지양해야 한다”며 “물가가 2%로 수렴할 수 있도록 현재의 금리 수준을 당분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하지만 생산 현장에서 경기 둔화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어 정부가 언제까지 정책 기조 초점을 물가 안정에만 둘 수 있겠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전직 고위 경제 관료는 “올해 상저하고는 이미 물건너 갔고 상저하중·상저하저 가능성도 있다”며 “큰 충격 없이 정책 기조를 물가 안정에서 경기 부양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역량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