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위스키 생산 역사가 100년도 넘었어요. 전 세계에 위스키 역사가 100년이 넘은 곳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일본 5개 국가 밖에 안 돼요. 한국은 이제 시작이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시작된 한국인들의 위스키 사랑이 식을 줄 모르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 1분기 위스키 수입액은 전년 대비 78.2% 폭증하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김창수 김창수위스키 대표는 16일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에서 “고급주로 분류되는 위스키는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경제 수준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며 “위스키 인기가 커진 건 코로나19로 ‘혼술·홈술’ 문화가 확산된 영향이 크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한국인들의 경제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위스키 열풍 속에 김 대표도 더 유명해졌다. 수입산 위스키에만 익숙해져 있던 국내 소비자들은 ‘김창수’라는 이름과 함께 ‘우리나라도 위스키 만든다’라는 그의 자필이 적힌 위스키에 열광했다. 지난해 시장에 나온 김창수위스키 336병은 열흘 만에 완판됐고, 대형마트에서 20만 원대 거래되던 가격은 리셀가가 최대 200만 원대까지 뛰었다. 김 대표는 “1990년대에도 위스키 붐이 크게 인 적이 있지만 위스키 산업이 크려던 찰나, IMF 금융위기로 기세가 꺾였다”며 “지금은 당시보다 경제 수준이 좋아졌기 때문에 위스키 열풍이 꽤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술이 좋지만 “‘부어라 마셔라’는 NO”
김 대표의 위스키 사랑은 스무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젊었을 때부터 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맥주, 와인, 증류주, 전통주 등 다양한 종류의 술을 탐구했다. 맥주와 전통주를 직접 제조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피트’ 계열의 ‘라프로익’ 위스키를 접하게 되고 위스키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술은 좋아하긴 했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만연해있던 ‘부어라, 마셔라’는 식의 음주 문화는 반기지 않았다. 음주 문화를 바꾸기 위해 대학교에서 건전 음주 문화 동아리를 만들고, 캠페인도 진행했다. 지방자치단체의 기관과 연계해 알코올 중독자의 치료를 돕는 활동도 했다. 그는 “벌컥벌컥 들이붓듯 마시는 술들은 주류 특성상 15도 이하의 저도주일 수밖에 없다”며 “고도주는 절대 그렇게 마실 수 없는 술이라 더 잘 맞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위스키가 인기를 끄는 것도 음주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방증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류 업종 전전하며 접한 한국 위스키 산업의 ‘암(暗)’
대학을 졸업하고 막상 취업 시장에 문을 두드려보니 술과 관련된 직종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중국어학과인 전공을 살려 영업직으로 첫 직장을 다녔다. 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김 대표는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갈망이 점점 커져서 퇴사를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입사 10여 개월 뒤 그는 술과 관련된 일 찾아 직장을 그만뒀다. 이후 바텐더, 주류 판매·수입·유통 등 직종을 근근했다.
하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가 새로 갖게 된 일은 ‘술’ 그 자체 보다는 술과 관련된 ‘사업’에 가까웠다. 김 대표는 “막상 해보니 술보다는 마케팅이나 판매, 유통 등 일반 회사의 직장인들이 하는 일과 비슷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술을 직접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위스키 수입 회사에서 몸담은 경험이었다. 그는 “종가세 때문에 위스키 수입업자들이 수입 원가를 낮추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다”며 “절세를 위한 ‘원가 후려치기’, 본사의 배당금 폭리 등 한국 위스키 산업의 어두운 면을 직접 접하니 한국에서 직접 술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위스키 본고장 스코틀랜드 모험에서, 일본 연수까지
그렇게 술과 관련된 직업들도 그만두게 된 김 대표는 2014년, 28살의 나이에 무작정 위스키 본고장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수중에는 그동안 일하면서 모은 돈과 퇴직금을 합해 1000만 원 남짓이었다. 숙박비와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텐트에서 생활하며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스코틀랜드의 양조장 102곳을 돌며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비자 문제 등으로 모두 거절당했다. 김 대표는 “당시에도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산업이 모두 대기업화돼 있었다”며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삼성전자 공장에 찾아가서 무작정 일을 시켜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했다”고 회상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는 귀국을 결심해야 했지만 결실이 있었다. 일본의 ‘지치부 증류소’ 직원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의 마지막 날 그는 글래스고의 한 위스키 바에서 치치부 증류소 직원을 만났다. 그곳에서 그와 인연을 쌓은 김 대표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연락을 계속하며 위스키 제조 노하우를 공유했다.
그러던 중 일본 NHK 방송 서울지국에서 취재 요청이 왔다. 김 대표를 한국의 ‘맛상’으로 촬영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에서는 지금의 한국과도 같은 위스키 열풍이 10년여 전 일었다. 2014년 방영된 150부작 아침 드라마 ‘맛상’이 대성공을 거두면서였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케쓰루 마사타카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였다. NHK의 취재 덕분에 그는 지치부 증류소에서 직접 연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이 경험은 훗날 김창수증류소를 세우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됐다.
위스키 후발주자 한국, 사계절 뚜렷해 위스키 숙성에 ‘제격’
그렇게 10여 년 간 위스키에 대한 식견을 넓혀온 김 대표는 ‘이제는 할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으로 2020년 7월 경기도 김포에 ‘김창수위스키 증류소’를 열었다. 그리고 2년 뒤 한국인이 최초로 만든 싱글몰트를 내놓는다. 김 대표는 “한국은 스코틀랜드보다 사계절이 뚜렷해 상대적으로 숙성 속도가 빠르다”면서 “‘스코틀랜드에서의 숙성 10년=한국에서의 숙성 3년’식으로 위스키 품질을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기후 환경 측면에서 한국은 큰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김창수위스키 증류소는 200여개의 캐스크를 품고 있다. 모두 김 대표와 그의 친구가 손수 재료를 구입하고 증류·발효해 만들어낸 위스키다. 이곳의 증류기와 발효탱크 등 설비는 모두 김 대표가 직접 디자인하고 개발했다. 그는 내년에 ‘3년 숙성’ 위스키를 정식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앞서 출시한 위스키들은 정식 제품 출시보다는 ‘맛보기’에 가깝다. 그럼에도 “숙성 연수가 2년이 안 돼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이상”이라며 호평이 이어졌다. 위스키 평가 사이트 위스키펀에서는 “케이팝(K-pop)을 이을 케이몰트(K-malt)”라고 평가했다. 김 대표는 “지금까지 총 1000병 정도가 판매됐는데 내년에는 더 많은 제품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며 “가격은 지금과 비슷한 수준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산·운영비는 고스란히 빚…'제일 맛있는 위스키' 만들겠단 사명감으로 버텨
내년이면 그가 10년 넘게 쌓아온 노력이 결실을 맺을 것을 앞두고 있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김 대표는 “오픈런이 인다고 하지만 한 달에 수천만 원의 운영 비용이 들어 빚만 쌓이고 있다”며 “오늘 만든 위스키는 3년 뒤에나 팔 수 있기 때문에 오늘 만들면서 드는 비용은 그대로 빚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돈을 아끼기 위해 설비를 직접 수리해가며 일주일에 절반을 이곳에서 밤을 새운다”면서 “위스키를 좋아하는 마음과 사명감이 없으면 여기까지 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위스키’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김창수위스키가 나중에 크게 번창하더라도 사업가보다는 위스키를 잘 만드는 장인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