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우디아라비아의 북서부 홍해 인근 사막이 ‘네옴’이라는 스마트시티로 탈바꿈하고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하는 ‘비전 2030’의 일환으로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의 44배 크기인 네옴시티에는 5000억 달러(약 660조 원)가 투입된다. 길이 170㎞의 자급자족형 도시 더 라인, 지름 7㎞의 해상부유식 첨단산업단지 옥사곤, 초대형 산악관광단지 트로제나가 들어선다. 계획대로라면 2030년에 완성돼 900만 명이 거주하게 된다. 스마트시티에 걸맞게 에너지는 태양광·풍력 등을 활용하고 식수는 담수화 플랜트로 바닷물을 정화해 쓰게 된다. 빈 살만 왕세자는 “2030년까지 메탄가스 배출량을 30% 줄이고 수도 리야드에는 나무 4억 5000만 그루를 심겠다”며 “206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우디의 2060 탄소 중립 목표는 미국·유럽·한국보다 10년 늦지만 중국·러시아와 같고 인도보다는 10년 빠르다.
◇탄소 중립, 우리 경제에도 ‘발등의 불’
지구촌 곳곳에서 기후재난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폭염과 폭우, 대형 산불 피해가 커지고 있고 유럽도 비슷하다. 폭염과 가뭄이 장기화하는 스페인 남부의 한 마을에서는 최근 74년 만에 기우제를 다시 올렸다. 인도에서는 지난달 야외 행사 중에 열사병으로 최소 13명이 숨졌다. 말레이시아의 한 여성은 최근 소셜미디어에 태양열로 계란이 익어가는 모습을 올렸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기후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물·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해수면 상승으로 나라의 존망이 걸린 섬나라들도 적지 않다. 페테리 탈라스 세계기상기구(WMO) 사무총장은 최근 “지구 기온이 2027년까지 산업화 이전보다 일시적으로 1.5도 이상 오를 가능성이 66%에 달한다”며 “1.5도를 넘는 빈도도 잦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문제는 유럽뿐 아니라 미국도 탄소 중립을 무역장벽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우선 유럽연합(EU)은 10월부터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철강·시멘트·알루미늄·비료·수소·전력 등 6개 품목에 대한 탄소국경조정제를 시범 도입하기로 했다. EU 기준치를 초과한 탄소 배출량에 대해 탄소국경세를 적용하는 것으로 2026년부터 본격 확대된다. 전기를 많이 써 탄소 배출이 많은 철강·반도체·자동차·석유화학 등 제조업이 발달한 우리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세계적으로 모든 에너지원으로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쓰자는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 확산도 우리 기업들에는 부담이다. 2014년 영국 비영리단체 더클라이밋그룹 등은 2050년까지 기업들의 사용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며 그렇지 못한 곳은 웃돈을 주고 전기를 사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 발전 전력 비중이 10%도 되지 않는 우리 입장에서는 달성하기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우리 정부는 RE100 이행이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현재 국내 전력 생산의 30%가량을 차지하는 원자력발전을 포함한 CF100(Carbon Free 100%) 개념을 추진하고 있으며 내년까지 인증 제도도 만들 계획이다. 무탄소 에너지로 전력을 100% 공급한다는 뜻이 담긴 CF100은 재생에너지 외에 원자력·청정수소 등도 포함한다. 미국 정부도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을 통해 친환경 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그 기준을 CF100으로 잡고 있다. 김상협 2050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민간위원장은 “재생에너지를 늘리면 RE100의 직간접 영향을 받는 기업을 돕게 된다”며 “나아가 CF100의 세계적 확산을 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상엽 KAIST 연구부총장은 “RE100만 고집할 게 아니라 CF100을 염두에 두고 바이오메스 등 다양한 에너지원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들, 탄소 중립을 존망의 문제로 인식
‘2050 탄소 중립’과 관련해 대기업들은 선도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탄소 중립은 기업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자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라며 “스콥3(기업의 가치사슬에서 발생하는 모든 탄소 배출)을 포함해 2050년 탄소 중립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 부회장은 이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형욱 SK E&S 사장은 “우리나라가 수소 분야나 탄소 포집·저장 등 탄소 중립 기술에서 세계적 기술 리더십을 주도할 수 있는 분야가 적지 않다”며 “정부가 연구개발(R&D)과 인프라를 확대하고 수요 시장을 만들어주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남석우 삼성전자 반도체제조부문 사장은 “D램·파운드리 등 반도체 칩당 탄소 배출도 계산했다”며 “2050 탄소 중립 로드맵에 맞춰 외부 압박이 큰데 그린칩 설계부터 들어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남 사장은 “인공지능(AI)과 챗GPT 관련 반도체를 생산할 때 어마어마한 전력이 필요하다”며 “재생에너지 외에 수소와 원자력 등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동욱 현대자동차 전략기획 부사장은 “현대차·기아는 연 750만 대의 차를 생산하며 1.2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며 “2045년까지 탄소 중립을 발표했는데 11개국 37개 공정의 저탄소화, 버스와 트럭 수소 전동화, 협력사 기술 지원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소개했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 비현실적이지만 미리 대비해야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을 지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정부에서 2018년 대비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40% 달성 목표를 제시했다”며 “10대 경제 대국의 위상에 맞게 기후위기 대처만큼은 목표가 좀 높더라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올해 정부의 탄소 중립 예산을 면밀히 들여다보니 R&D 예산 증가율이 크게 둔화해 기후위기 대처와 성장동력 확충에 지장을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반면 김명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장은 “지난 정부 때 우리 에너지 수요가 정점을 찍지 않은 상황에서 2030년 NDC 40%를 표방한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원자력을 빼놓고 미성숙하거나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로 줄이겠다고 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회장은 이어 “우리가 제조 분야에서는 강하지만 원천·기초기술이 약하고 R&D 사용화 단계에서도 선진국보다 떨어진다”며 “이제는 여성과 각 분야의 인재 융합, 과학기술 혁신, 산학 협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2030 NDC 40% 감축을 위해서는 보통 압박이 가해지는 게 아니다. 시민운동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얘기”라며 “그렇다고 수건 돌리기 식으로 미루다가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으므로 탄소 중립 과학기술을 대폭 강화해 미래 먹거리와 산업을 창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융합 인재 양성과 범부처 R&D 측면에서 겉도는 것에 대해 책임감과 문제의식을 느낀다며 탄소 저감, 스마트 기술 산업화와 글로벌화를 위한 국가전략 수립을 역설했다. 원 장관은 이어 “우리가 전기차·수소차·스마트시티 등 탄소 중립 기술에서 상당히 경쟁력이 있다”며 “사우디 등 중동, 인도네시아·우크라이나 등에서 지원과 협력을 원하는 것이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탄소 중립 R&D 드라이브 걸어야
제선 공정의 환원제와 열원으로 석탄을 사용하는 철강 분야는 1톤을 생산할 때마다 탄소를 2톤이나 배출할 정도이다. 하지만 석탄으로 수소로 대체하는 수소환원제철을 개발하면 용광로가 없어도 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고도 쇳물을 만들 수 있다. 포스코 외에 유럽·일본 철강사들도 이 기술에 열심히 투자하고 있다. 포스코는 2030년까지 상용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을 목표하고 있다. 포스코는 탄소를 흡수해 땅에 묻거나 친환경 연료와 드라이아이스 원료 등으로 쓸 수 있는 기술 개발에도 나섰다.
수소환원제철 등 기후위기 대응 기술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19일 발표한 탄소 중립 100대 기술 개발 청사진에 들어 있다. 100대 기술을 보면 우선 철강·석유화학·시멘트 등 산업 분야에서 수소환원제철과 탄소 포집·활용·저장 등 44개 과제를 들 수 있다. 태양광, 풍력, 수소, 무탄소 전력 공급, 전력 저장, 전력망, 원자력 등 에너지 전환 분야에서는 초대형 풍력터빈과 고온초저온 히트펌프 등 35개 과제가 꼽혔다. 수송·교통 분야에서는 차량용 2차전지 시스템과 선박 전기 추진 시스템 등 13개 과제가 선정됐다. 건물·환경 분야에는 건물 신재생에너지 융합 시스템과 국토 탄소 흡수 증진 등 8개 과제가 있다. 정부는 범부처 차원에서 예산을 조정해 R&D 투자를 늘리고 예비타당성조사 기간도 단축하기로 했다.
주영창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대학의 탄소 중립 연구를 실증하기 힘든데 탄소기술파운드리 같은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며 “중소기업 등 기업들의 정확한 탄소 모니터링을 통해 표준을 정립하겠다”고 말했다. 주 본부장은 이어 “탄소 중립 R&D 예산이 2조 3000억 원으로 지난 3년 동안 두 자릿수로 증가했다”며 독일·사우디·호주 등과의 국제 협력 사례를 소개했다. 김상협 위원장은 독일은 AI 활용 지능형 전력망, 우크라이나는 블루수소 등의 R&D를 같이하자고 제안해왔다고 전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탄소 중립은 힘들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이다. 특히 무역 장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정부와 기업은 탄소 중립에 철저히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문재인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현실에 맞지 않게 ‘과속’으로 설정했다는 지적이 많으므로 기업들과 협의하며 어느 정도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 또 원자력과 수소 분야에서 강점을 가진 우리나라는 RE100을 넘어 CF100도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