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분기 합계 출산율이 역대 최저치인 0.81명을 기록한 가운데,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비단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와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최근 '노동과 출산 의향의 동태적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남성의 소득 수준과 혼인율의 상관관계에 주목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 번이라도 결혼한 적이 있는 수치를 나타내는 '혼인 비율'은 모든 연령층에서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소득 남성(소득 상위 10%)들은 30대 후반 이후 혼인 비율이 급속히 높아지지만(30대 중후반 91%), 저소득 남성들(소득 하위 10%)은 미혼 상태로 남아있는 경우(30대 중후반 53%)가 많았다.
특히 남성 임금의 불평등도가 커지면 결혼에 필요한 소득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남성이 늘어 결혼 가능성을 낮추는 것으로 분석됐다.
'결혼+출산=행복'?…"혼자가 편해요"
저출생·저출산 현상의 밑바탕엔 이른바 ‘MZ’로 불리는 세대 사이에 보편화된 ‘비혼’ 문화가 깔려있다. '결혼=행복, 비혼=불행'이라는 도식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인식이다.
지난해 9월 인구보건복지협회는 만 19~34세 청년 1047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제1차 저출산 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결혼 의향에 대해 ‘하고 싶지 않은 편’이라 답한 청년은 51%였다. 남성은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71.4%)’라고 가장 많이 답한 반면, 여성은 ‘혼자 사는 게 행복해서(37.5%)’라고 답했다.
출산 의향에 대한 답변에서 부정적 인식은 더욱 두드러졌다. 출산을 꼭 하겠다는 응답은 17.1%에 불과했으며, 이유는 양육비나 교육비 등 경제적 이유가 57%로 가장 컸다. 이 밖에도 ‘내 삶을 희생하고 싶지 않아서(39.9%)’, ‘사회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36.8%)’ 등이 꼽혔다.
'베이비붐 세대'가 낳은 '밀레니얼 세대'의 선택
현 출산연령 세대는 1980년대~1990년대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다. 이들의 부모는 한국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을 경험한 베이비붐 세대로, 경제적으로는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시기를 살아왔지만, 성장과정에서 극도의 가난과 IMF 경제 위기 등 한국 경제의 주요 사건을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의 물질주의적, 경쟁지상주의적 가치관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부모의 근면성실 덕에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플렉스’로 대표되는 ‘나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워라밸’이나 ‘가심비’ ‘나를 위한 소비’ ‘맞춤형 소비’ 등의 가치소비를 즐기는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현재 나의 행복’이 최우선되는 가치다. 부모의 높은 교육열 때문에 치열한 입시 경쟁을 거쳤음에도 장기화된 불황으로 혹독한 취업난을 겪은 이들은 또 극심한 경쟁과 스트레스로 인해 생겨난 ‘혼술(혼자 마시는 술)’ ‘혼밥(혼자 먹는 밥)’ ‘혼행(혼자 가는 여행)’ 등 ‘나홀로 소비’를 즐기기도 한다. 롯데멤버스가 발간한 ‘2019 트렌드 픽’ 자료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는 26.6%가 가격과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제품은 무조건 구매한다고 답한 반면 베이비붐 세대는 17.8%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가치관의 변화가 저출산 현상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좋은 삶'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사회발전보다는 자신만의 물질적 풍요를 중요시 여기는 출산연령 세대의 가치관이 저출산 문제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서울 시민 81% “자녀는 ‘경제적 부담’입니다”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와 한국 리서치가 지난해 말 '아시아인의 가족과 행복'이란 주제로 서울·뉴욕·베이징 등 대도시 15곳에 거주하는 만 18~59세 시민 1만500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 시민의 81%가 자녀에 대해 ‘경제적 부담’이라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조사에 참여한 전 세계 주요 도시 15곳 중 1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자녀로 인해 부모의 자유가 제약된다’ ‘자녀가 있으면 부모 중 하나는 커리어의 기회가 제약된다’는 응답률도 각각 80%를 넘었다.
일부 전문가는 “아이 낳기를 꺼리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안은 사회가 지향하는 좋은 삶의 가치를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구감소가 가져올 경제성장 둔화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사회적 담론을 끌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전문가 또한 “물질적 풍요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발전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화상 또한 바뀌어야 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