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는 구한말 조선에 주재하며 내정 간섭을 일삼았던 중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은 조선 출병을 결정했고 당시 23세였던 위안스카이도 사령관 보좌관에 해당하는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됐다. 임오군란 수괴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하고 갑신정변 때 일본군을 진압해 고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마지막 자주적 근대화 기회를 날렸다는 지적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 일시 중국으로 귀국했다가 1885년 흥선대원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9년여 동안 조선 주재 청나라 교섭·통상 대표를 맡아 내정에 간섭했다.
위안스카이의 오만 방자한 안하무인 행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군복을 입고 말을 탄 채 궁궐에 무단으로 드나드는가 하면 고종에게 삿대질을 하기도 했다. 고종이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하자 “이 씨 중 현명한 사람을 뽑아 새 왕으로 세우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기록도 있다. 본래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지만 그의 횡포는 청나라의 대(對)조선 정책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제 고종이 청나라에 위안스카이 면직을 수차례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는 조국인 청나라의 근대화까지 지연시켰다. 군벌을 등에 업고 서태후와 손을 잡아 개혁 세력을 처단했으며 쑨원과 협력해 선통제를 퇴위시켜 청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본인이 황제에 즉위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비공개 국무회의에서 “싱하이밍 대사의 언사가 위안스카이를 떠올리게 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고 한다.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 체제에서 팽창주의를 노골화하고 있다. 늑대처럼 힘을 과시하는 ‘전랑(戰狼) 외교’에 휘둘리면 중국의 오만함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싱하이밍 논란이 고조되는 와중에 더불어민주당 의원 5명이 중국을 방문해 ‘관계 개선 모색’을 논의했다고 한다. 내치에서는 대립할 수 있지만 외교에서는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책임 있는 야당의 모습이다.